황호선(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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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고 (12월23일)
유현택 2011-12-23 추천 0 댓글 0 조회 3186
 안녕하세요!


우리 영어학원은 할 수 있으면 분기마다 MT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올 봄부터 그러니까 2 분기부터 시작한 여행이 벌써 3차이니 성실하게 지켜 왔다고 자부한다. 내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나의 기질도 있지만 라오스 젊은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자유와 여유를 경험케 하고 싶다. 여행을 하면서 차창 밖을 응시하며 하나라도 더 보며 감동하는 눈동자가 아름답다. 사진을 찍으며 기뻐 웃는 모습들이 아름답고 차멀미로 고통하며 무기력하게 쓰러져 자는 모습들이 귀하다. 후에 이 젊은이들이 다른 젊은이들을 이끌고 다시 이런 여행을 하리라.

        여행의 모든 경비는 영어 학원에서 부담한다. 불광동학교에서 교사 수련회를 하던 것과 같다. 사실 먹고 살기 빠듯한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에게서 쌀과 용돈들을 받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여행은 저 다른 나라의 얘기일 뿐이다. 이런 친구들에게 영어 학원에서 비용을 들여 여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올 4 분기 MT는 영어 학원 크리스마스 방학 기간 중 ‘씨앙쿠앙’의 ‘싸이’라는 학생의 고향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국 불광동 학교에서 내년 초에 있는 대회에 참석하게 되어 일정을 급하게 조정하게 된다. 다행히 12월 2일이 라오스 국경일이고 금요일이다. 게다가 12월은 ‘몽’ 또는 ‘크몽’이라 불리는 부족의 설이어서 각 마을에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고 하니 우리의 여행 기간은 그야말로 황금연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목요일 저녁에 출발해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새벽에 돌아오는 것으로 일정을 조율한다.

        여행지는 ‘씨앙쿠앙’이라는 산골 도시로 위엥짠에서 북동쪽으로 400킬로 정도 위치한다. 차로는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 ‘씨앙쿠앙’에서 약 20킬로를 더 들어가는 시골 마을이 ‘싸이’의 고향이란다. 내 차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씨앙쿠앙’은 약 해발 1200미터에 있는 작은 도시여서 기온 선선하고 자연이 아름답단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도시라고 다들 칭찬하는 곳이다. 언제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지역이다.

        이 ‘씨앙쿠앙’ 지역에 ‘몽’족이 많다고 한다. ‘몽’ 또는 ‘크몽’은 라오스 뿐만 아니라 태국과 베트남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사는 부족이다. 이 부족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들이 몽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외모나 성품이 우리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우리 영어 학원의 청년들 대부분이 이 ‘몽’족이다.

        ‘싸이’는 ‘무아양’이라는 청년의 인도로 말씀 공부에 참여하게 됐다. 국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전도유망한 학생이다. 항상 웃는 모습에서 온화한 성격을 금방 알 수 있는 친구다. 이 친구는 이미 고향에 다녀 왔다. 라오스 정부는 12월 몽족의 설에 학생들에게 2주간 방학을 허용한다. 정규 방학이 아닌 특별 방학이다. 몽족 학생들은 이 기간 중 자신이 선택해 2주간 방학을 가질 수 있는데 ‘싸이’는 이미 고향에 다녀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다시 가기로 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싸이’의 고향에 방문하면 ’싸이‘의 아버지가 소 한 마리를 잡아준다는 것이다.

        날짜가 정해졌으나 교통수단이 화두로 떠오른다. 12시간이 소요되는 산악 험로로 유명한 곳이다. 내 차는 아무래도 무리다 싶다. 더군다나 여행 2 주 전에 태국의 국경도시인 농카이에서 한 달치 장을 보고 라오스로 돌아오는 길에 엔진하부가 터져 버렸다. 타임벨트가 끊어져 헤드가 깨졌다면 관리 소홀이라지만 작년에 새 것으로 교환했던 터다. 이 건 순전히 품질 문제란다. 14년된 차라고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여간 쓰린 속을 달래고 거의 1,000$을 들여 중고엔진으로 교환한 상태이다. 하지만 엔진 오일이 많이 새어 나와 믿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한국 제품에 대해 자부심이 아닌 카니발 엔진의 내구성에 의문을 품고 있는 나로서는 선뜻 결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버스로 가자니 순수 차비만 10명 기준 300$에 이른다. 버스로 가면 짐을 줄여야 하기에 냄비나 식기류를 가지고 갈 수 없어 모든 음식을 매식해야 하니 버스비보다 음식 값이 더 들어가게 되니 버스 여행은 불가능하다. 렌트카를 사용하자니 하루 30$로 5일간 150$에 기름값(150$)을 더하면 역시 비용이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이  내 차로 가기로 결정한다. 떠나기 이틀 전에 정비소에서 무료 AS를 받아 기름 유출이 어느 정도 잡혀 마음이 한결 수월해진다.

        여행 중 비용은 최소화하는 것이 나의 미덕이다. 대학 산악부에서 몸에 밴 짠돌이 여행은 뼈 속 깊이 아니 나의 DNA 자체를 바꿔 놓은 상태라 다른 사람들이 양보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다보니 나와 함께하면 짐이 많고 고달프다. 큰 냄비에 식기류 일체, 휴대용 가스렌지, 하다못해 소금과 마늘, 양파까지 다 털어 박스나 비닐에 담아 준비한다. 육류는 한 달에 한 번 태국에서 장을 봐와 냉동 보관하는 것 중에 치킨으로 약 4 킬로를 아내 몰래 봉투에 담아 낸다. 잠도 가능하면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야외에서 노숙을 고려해 대전 새희망학교에서 작년에 선물로 놓고 간 모기장 4개와 은박지 8개, 그리고 집에 있는 두툼한 이불들과 두꺼운 옷들 대부분을 챙긴다. 내 가족만이 아닌 여행 경험이 전혀 없는 라오스 청년들은 제대로 준비를 못하거니와 준비할만한 것이 변변치 못하니 가진 것이 많은 나의 도움이 필요해서다. 아직까지 노숙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내가 안전을 이유로 반대도 하거니와 라오스의 통제된 특이한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아무 곳에서나 잘 수 없고 특히 외국인은 반드시 게스트하우스나 호텔에서 자야 한다. 라오스인도 방문하면 신고를 하는 것이 법이지만 대부분은 그냥 방문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노숙에 성공하고 싶어 이것저것  다 챙기다보니 방 안이 휑하니 찬바람이 분다. 그래도 아무리 경비를 아낀다고 하지만 라오스 청년들을 위한 특식은 잊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꿈도 못 꾸다가 한국에서 선물로 보내 줄 경우에나 같이 나눠 먹는 한국 라면은 과연 특식 중 특식이다. 한국 가게에 들러 신라면은 너무 비싸서 못사고 가장 저렴한 김치라면(6,000킵-900원)을 24봉(약 2만 3천원), 김(60,000킵-약 9000원)과 다른 약간의 간식 거리를 구입하니 마음이 뿌듯하다.



12월 1일 목요일


5시 30분

        오후 수업을 미리 앞당겨 5시 30분에 마친다. 오늘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시작했다. 이미 아이들에게 우리가 ‘씨앙쿠앙’에 갈 것이라고 자랑을 많이 한 터라 다들 부러워한다. 수업 전에 차에 실어 놓은 엄청난 양의 이불과 옷가지, 식기류들을 보고 아이들이 난리다. 부러워하는 아이들을 앞에서 그 많은 짐을 다 정리해 차 트렁크와 차 위에 나눠 싣는다. 상당한 양이다. 차가 견딜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들을 보내고 저녁을 간단히 준비해 먹는다. 저녁은 ‘삥빠’라고하는 붕어구이 두 마리에 ‘땀막훙’이라는 파파야 라오스 김치이다. ‘삥빠’는 1킬로 가까이 하는 큰 붕어의 내장을 발라내고 대신 레몬그라스와 양념을 넣고 비늘 있는채로 소금을 발라 숯불에 하는 소금구이인데 맛이 기가 막히게 좋다. 가격은 보통 마리당 20,000킵(3,000원)인데 역시 이 라오스 청년들은 내가 사 줄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단골집에서 구입하는 이 ‘삥빠’는 양념이 잘 돼 전혀 비린 내가 없고 입맛을 돋구는 향이 배어나온다.

         나, 죠이, 메이, 나이, 싸이, 무아양, 에, 건영, 세나....이렇게 9명이 영어학원에서 출발한다. 떠나기 전에 기념 촬영!

밤 8시 출발

        출발해 중간에 들러 ‘이야’를 태운다. 고향으로 아예 짐을 옮기는 터라 짐이 엄청나다. 거의 우리의 1/3이다. 차 지붕의 끈을 풀어 짐을 정비해 다시 묶는다. 거의 30분이 넘게 걸린다. 이제 정말 출발이다. 밤이 늦은 시간이니 차가 많지 않아 잘 빠져나간다. 이 상태로 가면 11시 쯤에 방비엥에 이를 것이고 노숙을 하며 모닥불을 피울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하지만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패인 도로가 환상을 죄다 깨트린다. 우기에 파이고 건기에 다시 매우기를 해마다 반복하는 것이 여기 라오스 도로 복구 방법이다. 하지만 올 해는 분위기가 다르다. 너무 심하고 패였고, 패인 곳이 너무 많다. 구간 구간을 나눠 일부러 파헤친 것 처럼 반복된다. 평소 방비엥까지 평소 2시간 40분이 소요된다. 하지만 이런 상태라면 생각보다 훨씬 많이 걸린다. 많은 인원과 짐을 잔뜩 실은 내 차는 패인 도로가 나오면 더 속도를 줄여야 하니 모든 차들이 추월해 간다. 추월할 때마다 엄청난 먼지를 우리 차에 선사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회의가 인다. 일정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소 고삐를 잡고 서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싸이’의 아버지를 생각하니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달리다 패인 곳이 나오면 급하게 속도를 줄이고 상태 좋은 곳이 나타나면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속을 붙이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패인 곳에 이르러는 그래도 상태가 좋은 부분을 찾아 지그재그로 운전하다보니 ‘싸이’ 상태가 말이 아니다. 중간 중간에 멈춰 여러 명이 토한다.

        세상에나 어쩌면 방비엥에 이를 때까지 변치않고 그런 구간이 반복되는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11시는 고사하고 새벽 1시를 넘겨 방비엥을 통과한다. 졸리지 않아 계속 가고 싶지만 다들 쉬고 싶단다. 하기야 배도 아니고 차가 파도타기를 하듯 왔으니 성한 사람이 없다. 방비엥을 한참 지나 도로 오른편에 낡고 한적한 초등학교가 보여 ‘메이’의 말에 따라 무작정 들어간다.

        교실 네 칸의 지붕이 녹슨 양철로 구멍이 숭숭 뚤려 있다. 운동장은 풀이 가득한데 메마른 건기에 생기 잃고 누렇게 변해있다. 그런 학교 교사를 지나 학교 뒷 뜰로 간다. 거기도 공터가 있고 산이 있다. 알맞은 장소를 차 전조등의 도움을 받아 찾아 정한다. 5시간 넘게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고 휘젓느라 수고한 팔과 다리가 차에서 내리자 고통을 호소한다. 잠깐 휴식을 취하며 주물러 준다. 그 사이 청년들은 야영 준비에 빠르게 움직인다.

        그 때 우리의 소란에 누군가가 후레쉬를 비추고 다가온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다가가 말하는가 싶더니 교실 안에서 자도 된단다. 노숙을 위해 준비해 왔지만 사실 너무 시간이 지체되고 피곤하다보니 노숙할 엄두가 나지 않는 참이었다. 교실 안에서 잘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주무르던 것을 멈추고 재빨리 차에 들어가 핸들을 돌려 문이 열려 있는 교실 앞으로 가서 정차를 한다.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청년들과 함께 조금도 주저함없이 교실로 들어가서 확인한다.

        교실 뒷 편에 이미 먼저 7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자리를 잡고 얼굴을 빼꼼이 내 놓고 자고 있다. 아무리 봐도 교사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러는 어둠 속의 낯선 침입자들을 졸린 눈으로 쳐다본다. 우리는 그들을 신경 쓸 틈도 없이 책상들을 가운데로 옮기고 교실 앞, 칠판 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깜짝할 사이에 모기장 세 개를 치고 은박지를 깔아 자리를 마련해 이불을 그 위에 넓게 깐다.

        모든 시골 학교들이 그렇듯 책상이 성한 것 없이 낡았다. 천정은 없고 바로 양철 지붕이다보니 퇴색한 서까래가 희미하게 교실의 갈비처럼 보인다. 구멍이 숭숭 뚫린 지붕은 환기에는 그만이다. 이런 교실 안에 새하얀 모기장 세 개는 화사하기까지 하다. 궁전이 따로 없다. 맞은 편의 사내들은 신기한 듯 아까보다 더 큰 눈으로 쳐다본다. 그 사내들에게 신경을 써줄 마음의 여유도 없이 그 하얀 궁전에서 들어가 왕의 잠에 빠져든다.

        

12월 2일

        얼마나 잤을까. 밖이 제법 소란하다. 우리 청년들이 부산하다. 아침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고 자기의 비밀스런 볼일도 보고 한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운전해야 하니 나름대로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 나른한 아침을 이불 속에서 잠깐의 여유로 즐긴다. 둘러보니 이미 저 쪽 다른 사람들은 떠나고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뒷산에 고압선 철탑 공사하는 사람들이란다.

        아무리 이불 속이 좋아도 더 있으면 안 되겠다싶어 일어나 밖에 나간다. 병풍처럼 기암괴석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설악산 천화대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이다. 예전부터 방비엥에 올 때마다 언제 한 번 릿지등반을 벼르고 있는 칼날 바위능선이다.

    아침은 우리 집에서 가져온 치킨숩과 밥이다. 멀미로 피곤했는지 많이들 먹지는 못한다. 건영이와 나만 식탐을 한다. 식사는 간단히 끝난다. 식사 후 떠날 채비를 한다. 각자 알아서 숲으로 가 버릴 것들을 자연에 그대로 되돌려 주고 온다. 이 학교도 여느 학교처럼 화장실이 없다. 물론 수도물도 없다. 다행 학교 옆에 조그만 계곡물이 흘러 그 물로 우리의 식사도 해결하고 그릇도 씻고 세수도 한다. 나도 숲에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되고 돌아와 출발한다.


12월 2일 오전 9시 쯤에 출발한다. 길은 본격적인 산악 도로로 들어선다. 도로의 패인 곳이 많이 줄어 상태가 좋아진다. 군데군데 패인 곳이 나타나지만 도로 전체를 들어내지 않아 어제와는 비교가 안 되게 상태가 좋다. 어제 못 달린 한을 푼다. 한국의 구 대관령도로를 12개 정도 합한 규모로 약 200킬로가 산악 도로다. 내 면허증이 지난 달 만료가 돼 ‘에’가 운전한다. 낮에는 경찰이 있을 수 있어 ‘에’가 운전을 하는데 제법 잘 한다.

        ‘에’는 나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믿은 친구다. ‘에’는 국립대 공대에서 IT를 전공하고 있다. 그는 나처럼 교사가 되기 원하며 우리 학원에서 생활한다. ‘에’는 정식 직원이 아니어서 특별히 우리 영어학원에서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매주 학원에서 30여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고향에 가서 부모님의 일과 고향 ㄱㅎ를 돕는다. 부모님의 주수입원은 느타리버섯이란다. 그래서 가끔 싱싱한 느타리버섯을 한 봉투씩 들고와 같이 요리해 먹는다.

  ‘에’는 동네 ㄱㅎ에서 노래를 인도한단다. 우리 학원에 머문지 이제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나의 믿음이 조금씩 가는 친구다. 처음에는 수도 근교에 사는 친구라 그런지 의심이 많은 친구다.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해 서로의 신뢰 관계가 만들어 지기 어려웠다. 그런 ‘에’가 나처럼 교사가 되기 원한다는 말을 쉽게 수긍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말씀 공부에 참여하면서 보이는 그의 모습과 어떤 일이 맡겨졌을 때는 책임을 다해 마치는 것을 보고는 신뢰가 가기 시작한다. 그것이 불과 2개월 전이다.

        우리가 ‘씨앙쿠앙’으로 떠나오기 전 주에 필리핀에서 두 한국인이 우리 영어학원을 방문했다. 나와 같이 공부한 지인의 친구로 필리핀 바기오에 있을 때부터 구면인 분이다. 이 분이 바기오의 ‘마라나타’ 말씀학교의 교장이다. 내가 나의 일과 우리 청년 가운데 헌신하는 친구들을 소개하자  졸업 후에 자신의 학교에 보내달라고  한다. 이 청년들이 오기만 하면 전액 장학금으로 도울 수 있다고 한다. 이 교장 선생님은 인도차이나 지역 교사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ㅅㄱ의 일에 일조하고 싶어 리서치차 인도차이나를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신뢰하기 시작한 ‘에’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물어보니 필리핀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한다. 그 자리에서 그 분에게 확답을 들으니 2년 후에 ‘에’도 필리핀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에’가 운전을 한다. 내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 운전을 얌전히 잘 한다. 큰 키에 동남아 얼굴형을 가진 ‘에’는 성근 턱 수염이 있는 친구다. 성격이 굉장히 차분하고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친구다.

        2시간 반을 꿈틀거리며 ‘에’ 운전에 따라 차는 잘 오르더니 산허리 휴게소에 다다른다. 산 아래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잘도 잡은 곳이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같아 보인다. 한 번 뜨면 방비엥까지 그냥 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30분 정도 쉬면서 사진을 찍는다. ‘메이’와 ‘죠이’는 이쁘게 포즈를 잡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사진을 찍는다. 출발 전에 물어보니 여기서부터는 경찰이 없단다. 내가 핸들을 잡고 출발한다.

        내가 핸들을 잡으면서 속도가 훨씬 빨라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길이 오르막길이긴 하지만 곧게 뻗은 부분이 많다. 40분 정도 더 가자 삼거리가 나온다. ‘푸쿤’으로 왼쪽편 도로는 ‘루앙파방’으로 가는 길이요, 오른편으로 돌면 우리의 목적지인 ‘씨앙쿠앙’이다.

        ‘푸쿤’을 지나면서 도로 분위기가 확 바뀐다. 심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뱀처럼 꿈틀러리는 도로이다. 이렇게 굽이진 도로를 카니발이 내가 의도하는대로 잘 움직여준다. 서서히 차에 대한 믿음이 가면서 나의 운전은 카레이서 수준으로 바뀐다. 조금도 주저함없이 핸들을 휘감아 돌리는데 코너웍을 제대로 해준다. 빠르게 달리다가 급커브나 내리막길이면  바로 엔진브레이크로 바꿔 속도를 줄인다. 운전하는 나는 재미있고 스릴있지만 뒤에 타고 있는 친구들은 죽을 맛이다. 그렇다고 마냥 천천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정이 촉박하기에 도로에서의 시간을 줄여야 한다.

        ‘에’가 운전할 때는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밖을 보면서 즐기던 친구들이 나의 놀라운 운전 실력에 그만 떡실신들을 한다. 20살 초반의 상큼한 얼굴들이 누렇게 뜨고 빛이 바랜 눈으로 초첨을 맞추지 못하고 마냥 흔들거리더니 아침에 먹은 밥이며 치킨들을 다 계곡 바람에 흩날려 버린다. ---어메 아까버라. 비싼 치킨들을 그냥..

        가엾은 라오스 친구들에게 값싼 동정을 줄 틈도 없이 차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내리 달린다. 주변 경치는 장관이다. 높이 갈수록 길 좌우에 억새들이 환호한다. 3미터 정도 되는 늘씬한 키에 하얀 얼굴들이 제법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들 사이를 운전해 가는 느낌이 꼭 한라산 자락 같다.

        크지 않은 산골 마을들이 길가에 올망졸망 나래비로 서 있다. 건기에 서 있는 생기없는 나무와 남루한 마을의 모습이 을시년스럽기까지 하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떼 국물이 줄줄 흐르는 허름한 옷으로 대충 몸을 가린 사내 아이들나 여자 아이들이 자신의 모습에 맞지 않게 해맑은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다.

        간혹 ‘몽’족 마을을 지날 때면 한껏 전통옷으로 멋을 낸 ‘몽’족 아가씨들이 줄을 지어 총각들과 어울려 공을 주고받는 것이 보인다. 빨리 지나치면서 보는 풍경은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이런 산간 마을에 짙은 검정 천이나 새하얀 천에 울긋불긋한 실로 화사한 무늬를 놓고 그 위에 은색의 동전들을 선을 이루면서 줄줄이 꿰어 단 옷을 입고, 머리에도 그 옷의 무늬와 색에 어울리게 치장한 모자까지 쓴 아가씨들, 밭에서 일하느라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오늘은 하얀 분을 발라 옷과 모자에 어울리는 맵시가 한국의 동화에 나오는 선녀라고 해야 할까. 그들과 마주선 남자들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한껏 멋을 냈지만 선녀 앞에선 총각들은 투박한 나무꾼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선녀와 나무꾼’은 한국이 아닌 여기 라오스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싶다.

        12시를 넘어 우리는 제법 큰 계곡물이 멋지게 흐르는 ‘남깟’이란 동네에 다다른다. 차를 세울 장소가 여의치 않아 경사가 있는 길가에 그대로 세우고 돌을 바퀴 밑에 궤어 놓는다. 찰밥을 3킬로 사서 아침에 준비해 놓은 치킨과 개울에 내려가 먹는다. 맛이 기가 막히다. 하지만 인사불성인 ‘무아양’은 저 멀리서 서성이며 다가오질 않는다. 내가 큼지막하고 맛나 보이는 치킨 다리를 들어 보여도 도무지 먹을 생각을 안 한다.     다행히 ‘싸이’는 어제 고비를 넘긴 모양이다. 아직 누렇게 뜬 얼굴이지만 꾸역꾸역 점심을 구겨 넣고 있다. 입맛이 없기는 ‘무아양’과 마찬가지인가 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돌아보니 아름다운 동네이다. 바위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이 맑다. 그 시냇물이 흐르는 곳곳에 돌로 쌓아 물길을 만들어 막대기로 고정한 물건들이 군데군데 있다. 끝에 배의 프로펠러가 달려 물속에서 돌돌돌 돌고 있다. 물 밖에 있는 몸체는 나무와 돌에 고정되어 떠내려가지 않게 해놨다. 모터다. 사람 머리 크기만한 모터를 수력으로 돌려 전기를 발생시키는 발전기인 것이다. 전기가 없는 시골에서 매우 유익한 물건이다. 하지만 이 동네에는 전기 시설이 잘 되어 보이는데도 굳이 이 간이 수력 발전을 이용해 쓰고 있다. 아무래도 전기료 때문인 듯 하다.

        식사를 마치고 1시가 넘어 출발한다. 차는 시동을 걸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러운 진동을 하며 출발을 기다린다. 클러치를 놓고 엑셀레이터를 살짝 밟자 그 많은 사람과 짐에도 아무 부담없이 부드럽게 움직여 준다. 뜸하게 큰 화물차들이 시골길에 어울리지 않게 길을 막는다. 왜 이런 대형 트럭들이 필요하나 싶었는데 나중에  ‘씨앙쿠앙’이 옥수수를 많이 생산한다는 것은 알게 된다. 바로 옥수수를 실어 나르는 차들인 것이다. 그 트럭들을 하나씩 추월해 뒤로 하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그렇게 2시간 정도 더 굽이쳐 오르니 길이 시원하게 뻗고 시야가 탁 트인 드넓은 초원이 나온다. 

   그 초원 가운데를 부드러운 비단길이 굽이쳐 흐른다. 시야가 확 트여 차는 중앙선을 신경쓰지 않고 스무스하게 미끄러져 길을 헤쳐 나간다. 해발 1200미터나 되는 곳에 이런 아름답고 드넓은 초원이 있을 줄이야. 진작부터 ‘씨앙쿠앙’이 아름답고 시원한 곳이라는 얘기는 들었으나 실제로 보니 너무 좋다. 자작나무 대신 유칼리투스 나무가 군데군데 숲을 이뤄  마치 섬처럼 보인다. 부드럽게 구릉진 이 곳을 마른 풀이 뒤덮고 있어 상당한 운치를 이룬다. 마치 대관령과 같은 분위기이지만 규모는 비할바 아니게 크다. 생각보다 많치 않은 소들이 풀을 뜯고 있어 더욱 커 보인다. 가끔 도로에도 무리를 지어 있는 소 떼들이 오가는 차들을 무신경하게 막고 쳐다본다.

        40분 정도를 빠른 속도로 달려가니 한국 군단위 읍소재지 규모의 도시가 나오는데 바로 '씨앙쿠앙'이다. 소박한 산골 도시다. 높은 곳에서 보니 넓다란 고원이 끝나는 지점에 여러 갈래 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 형국이다. 뒤 쪽으로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 둘러치고 있다. 그 산골 도시를 마주 보면서 ‘싸이’가 왼 쪽 길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몽’족 설을 위해 우리하고 같이 갈  ‘싸이’ 삼촌이 기다리고 있단다. 아스팔트를 벗어나 완전 시골길로 들어선다. 길은 모래와 잔자갈이 많아 잘 다져져 있어 생각보다 노면 상태가 좋고 먼지가 덜 날린다. 대지 경계를 나누는 사이사이로 길들이 나 있다. 길 가에 연못이 있어 더욱 서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곳이 여간 좋아보이질 않았는데 오늘은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본다.

 약 10분을 분위기 살려 운전해 가니 규모가 작은 유칼리투스 나무 숲을 등진 소나무로 벽을 세운 새집이 보인다. 담은 그냥 소가 드나들지 못하게 성글게 나무를 박고 철조망으로 둘렀다. 문은 대나무를 쪼개 만든 막대기로 얼기설기 이어 거의 쓰러진다. 옛날 나 어릴적 싸릿문보다 더 소박한 문이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람 좋아보이는 시골 아저씨가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싸이’ 삼촌이다.

        ‘싸이’ 삼촌 집에는 소 몇 마리, 오리, 닭 그리고 개 3 마리가 있따. 소 한 마리는 검정색인데 뿔이 앞으로 멋지게 뻗어 있고 어깨 위에 낙타처럼 혹이 툭 튀어나온 것이 범상치 않다. 싸움소란다. 마른 볏짚을 맛도 모르고 씹으면서 낯선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이 지역은 아직 전기가 없단다. 지금 전기 가설 중이어서 빈 전보대만 길 가에 서 있다. 이 집도 여느 집처럼 화장실이 따로 없다. 그냥 아무 곳이나 엉덩이를 가릴 곳이면 볼 일을 보고 돼지나 닭, 오리 아니면 개들이 다 청소 해주니 이 보다 더 좋은 자연이 어디 있을까. 그나마 집 오른 편에 자리잡고 귀하게 덮여 있는 경운기가 그나마 현대 도심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고산 지대여서 햇빛이 빨리 힘을 잃고 바람이 쌀쌀하고 강하다. 쌀쌀한 날씨에도 우리는 염치불구하고 마당 가운데서 자라고 있는 사탕수수를 부탁한다. ‘싸이’와 ‘에’가 능숙하게 낫으로 사탕수수 몇 대를 베어내 먹기 좋게 손질해 내 손에 쥐어 준다. 한 입 베어 무니 달작지근하고 향긋한 쥬스가 입안 가득하다. 싱싱한 그 맛에 멈추지 않고 두 아이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아빠는 순식간에 혼자 먹어치운다. 다들 먹기에 바쁘다. 이 구두쇠같은 사람을 믿고 따라와 간식도 없이 다들 고생이다보니 이 사탕수수 하나로 모두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들이다. 쌀쌀한 고원 바람을 쐬면서 사탕수수를 먹으니 다들 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표정들이 다 밝다. 몇 명은 저쪽 어디론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각자 알아서 볼 일들을 보고 온다. ‘싸이’의 삼촌이 9인승 차에 10명이 승차한 비좁은 공간을 밀치고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출발!

        ‘씨앙쿠앙’ 초입에 버스 터미널이 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 터미널 모양새다. 이 곳에 ‘이야’를 내려준다. ‘이야’는 신앙 생활한지 얼마 안 된다. 말씀학교에 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한다. 나와는 2개월 정도 말씀을 공부했다. 18살인 이 청년은 올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위엥짠에 내려와 오토바이 수리공으로 8개월간 일했다. 이제 그만 두고 귀향 중이다. ‘쌈느아-라오스 최북단베트남과 국경 지역’로 간단다. 다시 올지 안 올지 모른단다. 나는 이 친구에게 정말 나처럼 교사가 되고싶으면 다시 위앙짠으로 와 낮에는 일하면서 야간 대학을 마치라고 했다. 그런 다음 말씀을 공부하라고... 굿 바이, 이야!

   우리는 ‘이야’를 내려주고 다시 ‘씨앙쿠앙’ 읍내로 향하다가 처음 큰 네거리에서 우회전해 시외로 빠지는 길로 들어선다. 누런 흙먼지가 길 오른편에서 많이 인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곳이 ‘몽’족 설 행사장인가보다 하는데 그 곳에서 눈에 익은 한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차 뒤에서 ‘무아양’이 ‘녀’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녀’는 우리 학원에서 같이 말씀 공부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는 대학생으로 탄탄한 어깨를 가져 강인해 보이는 ‘몽’족 청년이다. ‘녀’도 설이라고 고향에 방문해 체육대회에 참여했단다. 여기는 설이면 소싸움, 축구, 달리기 등 여러 행사를 하는데 달리기에 참여해서 올 해는 시 대표로 루앙파방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다고 하니 상당히 잘 뛰는가보다. 나중에 위엥짠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도로는 시골 지역답지 않게 잘 되어 있다. 여기는 순전히 ‘몽’족 지역인가 보다. 곳곳에 ‘몽’족 복장을 한 아가씨들과 총각들이 줄을 지어 공 주고받기를 한다. ‘나이’와 ‘무아양’은 정신을 온전히 ‘몽’족 아가씨들에게 빼앗긴 거 같다.

        약 20킬로 쯤 왔다고 생각할 즈음 ‘싸이’가 급하게 오른쪽 시골 마을 길로 들어가라고 한다. 얼추 다 온 느낌이다. ‘휴! 이제 다 왔나보다’ 생각하고 배에서 힘을 뺀다. 그리고 여기 어디쯤 집에서 소 고삐를 잡고 우리를 기다리는 ‘싸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둘러 보는데 룸미러 속 나를 보며 ‘싸이’가 말을 한다

 “아짠 큰 빠이 푸 나 레 롱 빠이 익” ‘선생님, 저 앞 산을 넘어 내려갑니다’...

 헉!!..뭣이라 저 산을 넘는다고라!

앞에 큼지막한 산을 가리키며 넘어가야 한단다. 내 차가 갈 수 있냐고 하니 '보뺀냥 아짠-괜찮아요' 한다. 그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 가득 안고서.

        그 동네를 지나쳐 경사가 가파르게 진 산 도로에 접어들면서 뭔가 잘 못된 듯한 느낌이 전신을 확 감싼다. 하지만 갈 수 있다고 하니 기어를 1단에 넣고 악셀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아 타이어가 미끌리지 않게 출발한다. 삐끄덕 삐끄덕 하면서 육중한 차체와 바퀴가 울퉁불퉁한 길에서 엇갈리면서 마찰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한국에서 운전하시는 분들은 이 소리가 왜 나는지 잘 모를 것이다.

        지난 장마로 길 한 가운데가 계곡처럼 파였다. 이 곳을  바퀴가 양쪽 언덕을 정확히 밟고 가야 뒤집히거나 빠지지 않는다. 그래도 초입은 노면 자체가 황토흙이어서 부드럽게 이어진다. 하지만 조금 오르자 산 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산 중턱으로 접어 들면서 길이 심상치 않다. 움푹 패인 곳들과 큼직막한 돌들이 해저드같다. 이리저리 돌과 패인 곳을 피하느라 차바닥이 돌이나 높은 흙에 걸린다. 이런 곳을 피하느라 길가로 차를 붙이다 보니 나무 가지에 차가 긁힌다. 아무리 차에 대해서 마음을 비웠기로서니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이 눔아....’ 목까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친구니 원망할 수도 없고....

     내 마음이 어떻든 기분 좋은 엔진음을 내며 오른다. 맞은편 산이 마치 서울 우면산처럼 곳곳에 산사태가 나 삼각형 형태로 황토흙 얼굴 내놓고 있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하게 오른다. 하체에서 연신 질러대는 삐그덕 소리만 나지 않으면 대단한 차다 싶다.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쪽 면도 곳곳에 흔적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다행히 내 차가 낮고 운전하느라 계곡 밑을 내 자신은 못 봤지만 굽이 진 곳을 돌때 차의 뒤에 앉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길의 바깥 가장자리로 바짝 붙게 되니 길 아래가 너무 잘 적나라하게 보이는지 비명을 내지른다. ‘아이구, 죽으면 하늘 나라 가는데 무서워하긴..’

        그래도 다행 중 다행은  오르는 길의 계곡물이 잘 빠지도록 해서 웅덩이 진 곳이 한 곳만 있다는 것이다. 이미 라오스에서 이미 대여섯번 차를 진흙길에 빠트린 경험이 있던터라 어느 정도 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웅덩이가 5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고 언덕 쪽으로는 차들에 흙이 밀려 물 위로 얼굴이 나와 무르지만 통과 가능해 보인다. 물에 잠긴 곳의 타이어 자국을 살펴보니 경사가 완만하다. 이것은 물속 부분이 심하게 패이지 않았다는 뜻일게다. 차체가 지나갈 중간 부분은 무른 흙들이 올라와 있으나 차 하체로 그냥 밀고 나가면 될 것이다.

        일단 웅덩이를 살펴 결정했으니 후진으로 차를 2미터 정도 물러난다. 기어는 1단에서 엑셀레이터를 세게 밟아 속도를 올려 웅덩이로 들어서 탄력으로 치고 나가게 한다. 한데 이것이 오르막이다보니 차가 생각대로 빨리 지나지 못하고 땅이 무른 왼편으로 돈다. 단단한 땅에 타이어가 갈리도록 엔진 회전 수를 유지하면서 핸들을 재빠르게 오른편으로 돌렸다 다시 반대편으로 돌려 단단한 곳을 찾는다. 차가 몇 번 좌우로 꿈틀거리더니 단단한 땅을 밟는 기낌이 온다. 차가 웅덩이에서 쑥 빠져 나오며 우리는 환호한다.

        그 다음부터는 길이 그냥 다 좋아 보인다. 경사가 완만해지고 시야가 확트인 것이 고개 마루에 다 이른 것 같다. 참 산공기는 한국이나 여기 라오스나 모두 상쾌하다. 기온은 18도까지 떨어져 쌀쌀한 편이다. 세나는 유리 바깥에 맺힌 이슬이 얼음이라고 신기해 한다. 필리핀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1년만 보낸 세나는 눈에서 노는 것을 그렇게 그리워 한다.

        한 시간 가까이 올라 고개에 이른다. 앞 쪽으로 어디 마을 하나 보이지 않는 첩첩 산중이다. ‘어휴...저걸 어떡해’  ‘뭘 어떡해 그냥 내려가야지.’ ‘그래 가자. 니 소원 다 들어줄께.’ 엔진과 브레이크를 적절히 사용해 브레이크 고장에 신경 쓴다. 혹시나 브레이크가 문제가 생기면 손을 쓰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니까.

        어쨌거나 기분좋게 내려가는데 아니 ‘이게 황당 시츄에이션!’ 이 적막한 산골에 11톤 대형 화물트럭 여섯대가 길을 막고 있다. 도무지 내가 지나갈 틈이 없다. 선두 차가 펑크가 나 고치는 중이다. 지름이 1미터 가까이 되고 길이가 차만큼 긴 통나무를 여섯개씩 쌓아 실었다. 이런 차들이 다니는 곳에 내가 왔구나 하니 웃음만 나온다. 펑크난 차의 기사와 조수는 자기 가슴까지 오는 바뀌를 빼어내 수리 중이다. 저렇게 무거운 차를 들어올려 바퀴를 빼낸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다른 트럭들의 운전수들은 통나무 껍질을 벗겨내 불을 피워 불 주위에 모여 있다. 우리는 차 안에서 30분 정도 기다리다 수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차에서 내려 그들과 같이 불가에 가 불을 쬔다.

        내 차 안에는 히터를 켰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10도 가까이 떨어진 탓에 상당히 쌀쌀하다. 세나는 마냥 신났다. 내쉬는 숨에 입김이 너무 재미있단다. 참 오랫 만에 보는 입김이다. 위엥짠에서도 매년 11월과 1월 사이에 약한 입김을 뜸하게 볼 수 있다. 여기는 온도가 낮아 입김이 제법이다. 이렇게 쌀쌀한데도 아열대 활엽수나무들이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서 있다니 그저 신기하다.

        한 시간을 지나도 아직이다. 나는 그냥 마음을 비운다. 마음에 여유를 갖자 갑자기 배가 고파온다. 해는 지고 빛 하나 없는 칠흑처럼 어두운 산마루에서 먹는 김 조각이 그리 맛있다. 식사 때 ‘싸이’내 식구랑 먹을 요량으로 밑반찬으로 가져 온 김이 입에 녹는다. 내 차도 펑크가 났는지 오른쪽 뒷 바퀴가 조금 내려 앉았다. 낮에 ‘씨앙쿠앙’을 통과하면서 기회를 놓쳐 그냥 지나쳐 왔더니 산에서 이런 낭패를 당하나 싶더니 ‘무아양’이 수리 중인 사람에게 부탁하니 친절히 바람을 넣어준다. 너무 고마워 그 친구에게도 김을 나눠준다. 김이 게눈 감추듯 없어진다. 이것저것 다 찾아 먹는다.

        그래도 다 고쳤다는 소식이 없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기다리니 거대한 엔진음이 들린다.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지. 길이 좋든 안 좋든 빨리 목적지에 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연이어 큰 덩치들이 산을 울리는 소리를 내고 내 차 옆으로 지나쳐 사라지니 산은 다시 정막에 싸이고 내 차의 불빛만 어둠을 가르고 있다. 그야말로 칠흑이다. 30분 정도 차 바닥이며 옆구리를 긁으며 내려가니 짐승처럼 희미한 물체가 옆에서 움직인다. 사람이다.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보니 어렴풋하게 집의 모양들이 보인다. 풀로 이엉을 만들어 지붕을 올리고 나무로 벽을 세우니 군데군데 주변의 나무와 풀에 어울려 집들이 구분이 안 된다. 조금 더 내려가니 이런 집들이 여러 채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마을길이라고 반들반들한 돌들이 보이고 작은 갈래길들이 보인다. 군데군데 대문대신 세워 놓은 낮은 나무 기둥들이 마당과 길이 다르다고 알리며 서있다. 

        '''아짠  마 레오, 빠이 리아오 싸이‘(선생님, 다 왔어요. 왼쪽으로 돌리세요). 얼매나 얼매나 이 소리를 기다렸던가. 힘차게 김을 먹은 힘을 다해 차를 왼쪽으로 돌려 나무 기둥 둘 사이를 지나니 ’싸이‘와 비슷한 얼굴을 한 시골 아저씨가 차를 집 가까이 대라고 안내한다. 차에서 내리니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고 포옹까지 해준다. 허...어제 밤 8시 쯤에 출발해 밤 9시에 도착했으니 꼬박 25시간이나 걸렸다. 따뜻한 차 안에서 나와 잠시 인사하는 사이 한기가 느껴진다. 재빨리 자켓과 옷들을 찾아 대충 걸친다. 따뜻하다.

        집 안에 들어가 소개를 하는데 갑자기 혼돈이 온다. 방금 전에 ‘싸이’ 어머니라고 해서 인사를 했는데 다시 어머니라니....몽족은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는 부족이다. ‘싸이’ 아버지도 아내가 두 명이다. 아이들이 6명 쯤은 되는데 나의 입장에서 정확히 가족 상황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라 보이는 숫자로만 가늠 한다. 나이가 지긋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첫 부인인 것 같고 ‘싸이’의 엄마는 젊고 그 동네에서는 인물이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한 아버지에 두 부인이 한 지붕 밑에 한 남편과 같이 산다.

        집은 그냥 맨 땅바닥이다. 내 어릴 적 부엌 바닥과 같이 울퉁불퉁하다. 그 곳이 거실이고 양 귀퉁이에 2인용 침대가 하나씩 덩그렇게 놓여있고, 반대편 사각 한쪽 귀퉁이에는 판자로 성글게 막아 만든 방에 침대하나 놓을 작은 공간이 있다. 같은 땅바닥인데 벽을 세워 그 중간에 통로를 만들어 저편이 부엌이고 이편이 거실이자 침실이다. 부엌살림이래야  찌그러지고 불에 그을린 크고 작은 냄비들, 이가 빠지고 때가 낀 값싼 중국제 플라스틱 접시들, 그리고 수저가 다다. 그 부엌 한 가운데 불을 피워 추위도 쫓고 돌로 좌대를 만들어 냄비를 올려 요리도 한다. 방 안의 천정은 지붕재가 바로 보이는 구조인데 불을 피우면서 연기에 그을려 전체가 다 까맣다.

        여기는 전기가 없는 동네인데 오늘 지나쳐 온 ‘남깟’과 같이 근처 냇가에서 간이 개인 발전기를 돌려 얻는 전력으로 집마다 희미한 형광 전구가 하나씩 달려 있다. 놀랍기는 그곳에 제법 큰 용량의 스피커도 있고 DVD 플레이어며 TV도 있다. 낡기는 했지만 그래도 구색은 다 갖추고 있다. 전기 콘센트도 여러 개 있어 우리는 오자마자 전화기와 어제부터 오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열심히 찍느라 힘이 거의 쇄진한 ‘메이’ 카메라도 충전을 한다. 사실 전화기를 충전해 봐야 시그널도 안 뜬다 하지만 시간은 볼 수 있고 전기가 없는 곳에서 희미한 전화기 빛은 큰 도움이 된다.

        전기는 상당히 약한 편인가 보다. 시골이어서 아이들 영화 좀 보게 해 주려고 노트북을 꽂아 연결해 켜니 희미한 전등이 자꾸 눈을 깜박거린다. 전력이 약한 탓이다. 이내 영화 보여주는 것을 포기하고 노트북을 다시 집어 넣는다. 그나마 유일한 ‘메이’ 카메라를 충전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할 뿐이다.

        신기한 전기에 감탄하기도 잠깐 김만 먹은 배가 연신 주먹질을 해댄다. 귀한 손님들이 온다고 소까지 잡아준다던 주인장은 저녁을 줄 기미가 없다. 어떻게 밥도 안주느냐고 떼를 쓸 수도 없고 해서 선물로 줄려고 남겨 놓은 라면을 끓여 먹기로 결정한다. 우리가 9명에 여기 가족도 족히 그 정도는 되니 라면 14봉을 준비한다. 부엌 불 위에 있는 솥이 커 30개도 문제가 안 될 것 같다. ‘커서 그건 좋네.’ 밤이라 어떤 물인지도 모르고 묻지도 않고 있는 물을 그냥 끓인다. 생각보다 빨리 끓는다. 끓는 물에 라면과 다시마를 넣는다.

     라면이 다 끓으면서 나는 배식에 신경을 쓴다. 자칫 잘못해 먹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에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받을 수 있어 적게 먹어도 모든 사람이 맛을 볼 수 있게 조금씩 배식 한다. 조금씩 주니 건영이와 세나는 더 달라고 한다. 순간 내 얼굴은 늑대처럼 바뀌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얼굴을 돌려 ‘싸이’ 가족에게 순한 양의 얼굴로 바꿔 친절하게 접시에 덜어 준다. 불이 희미해서 내 얼굴의 변화를 못 본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여기 라오스 사람들은 일단 거절한다. 그렇다고 거기서 정말 안 주면 그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는 것이다. 나는 몸으로 경험해 잘 알고 있기에 라면을 떠서 그들에게 안겨다 준다. 그러면 두 번째부터는 자연스럽게 와서 먹기도 한다. 나도 먹기 힘든 귀한 한국 라면을 받아 들고 맛있게들 먹는다. 사람이 많으니 면이 그냥 바닥난다. 하지만 고맙게도 ‘싸이’가 접시에 밥을 퍼 온다. 라면은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이 일미인지라 남은 국물에 밥을 듬뿍 말아 먹는다. 포만감이 들고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저녁을 해결하고 나니 밤이 깊다. 어디 앉을 곳이 없어 잠자리를 준비하려는데 ‘싸이’의 큰 어머니(?)가 퉤하고 바닥에 침을 뱉는다. 여기는 그냥 방바닥에다 침을 뱉는구나 하며 침 뱉어낸 자리를 피해 은박지를 깔고 모기장 둘을 친다. 하지만 다들 침대에서 잔다고 해 나와 세나만 모기장을 사용하기로 하고 다른 모기장 하나는 철수한다. 건영이와 ‘나이’와 ‘에’는 차 안에서 잔다고 한다. 차는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침대는 메트리스가 없어서 새벽에 추울텐데....

        잠자리를 만들고 나니 ‘메이’와 ‘죠이’가 씻어야 한다고 호들갑이다.

 ‘아이구 여자들이란..이렇게 쌀쌀한데 그냥 대충 살지....’ 특히 ‘메이’는 내일이 설잔치라고 오늘 굳이 목욕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냇가에 같이 가 달란다. 이 엄동설한에 처음 온 내가 냇가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나한테 뭘 그리 원하는지. 그래서 하도 귀찮아서 이 밤에 보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우물에서 하라고 말한다. 나도 잠깐 가서 하루 온 종일 핸들과 씨름하느라고 새까맣게 가죽물이 든 손과 먼지로 덮인 얼굴을 씻는다. 정말 차갑다. 이런 날씨에 목욕이라니. 선녀도 아니고... 먼저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이불에 몸을 맡긴다. 잠시 후 뒤 따라온 ‘메이’는 덜덜 떨며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한다. 진짜 목욕을 한 것이다. 아니 그럼 그렇게 찬 물로 머리를 감는데 머리가 안 아프냐. ‘죠이’는 머리만 감았단다.

        ‘무아양’과 ‘싸이’는 이미 나가고 없다. ‘무아양’은 특별 지령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공무차 이곳에 온 친구다. 이 번 설에 꼭 색시를 찾아 와 장가를 가라는 부모님의 엄명이 하달된 것이다. 그러니 ‘무아양’에게 처자를 찾는 것은 발등에 불이고 이 번 여행자 중에서 가장 목적이 뚜렷한 사람이니 늦은 밤이라고 주저할 이유가 없다.

        이불은 많다. 내가 집에서 가져온 것도 상당한데 ‘싸이’네 식구들이 우리를 위해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다른 집으로 가는 배려를 해줘 남는 이불들이 많다. ‘나이’는 이불을 안 가지고 왔단다. ‘에’도 가지고 왔지만 홑이불이다. 이렇게 추운 곳에 한 번도 안 와 봤으니 강추위가 어떤 건지 모르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따뜻한 것을 골라 준다. 차에 가니 건영이가 차 앞 의자를 가로질러 누워 있다. ‘나이’와 ‘에’는 뒷 자리를 펴서 침대로 만들어 누워 있다. 혹시 모를 사고를 생각해 양창문을 약 5센티씩 내리고 뒷 창문도 열어 환기가 되게 도와주었다. 

        차에서 돌아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바퀴 둘러 본다. 별빛에 동네의 실루엣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정말 시골이다. 첩첩산중이다. 내가 자란 동네 임실보다 더 시골이다. 이런 동네에서 수도까지 유학을 왔으니 ‘싸이’는 정말 출세한 친구다. 그것도 국립대 법대 말이다.

  밤이 깊어지니 기온이 7도까지 떨어진다. 엄청춥다. 

   ‘와하하하...  아이고...영상 7도에 춥대...ㅋㅋㅋㅋ ㅎㅎㅎㅎㅎ’

아마도 한국에 있는 분들이 이 정도 기온을 엄청난 추위라고 한다면 웬 호들갑이냐면 이렇게 웃을 것 같다. 실은 그렇지 않다. 그냥 맨 땅바닥에다 구멍이 숭숭 뚤려 있는 나무 판자로 세운 벽, 그리고 지붕과 벽체 사이 그리고 벽과 땅 바닥 사이가 손바닥 넓이만큼 입이 벌어져 있으면 설설 끓는 온돌에 이중 삼중으로 만든 유리창과 벽으로 무장한 한국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영상 7도이지만 추위가 살을 파고든다. 여행을 많이 한 나는 한 여름에도 이불들을 챙겨 다니는 것이 몸에 배여 있다. 요즘처럼 낮은 온도일 경우에는 두꺼운 옷 여러 벌은 기본이다. 쌀쌀한 밤을 위해 나는 이렇게 준비한다.


3일 새벽 4시경

        새벽인데 인기척이 많이 난다. 4시가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말이다. 하기야 날씨가 워낙 차가우니. 우리야 이미 두꺼운 옷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포근한 밤을 보내고 있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손님이라고 우리에게 많이 양보해주고는 이런 한기를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새벽에 일어나 불을 피우고 그 불 옆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소일거리를 하면서 따뜻한 햇살이 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도 잠깐 일어나 차 안에서 자는 친구들이 송장이 되지 않았나 살펴본다. 어제는 건영이가 앞자리에서 누웠더니 이 새벽에는 뒷자리로 가 형들 사이로 파고들어 가운데에서 자고 있다. 물어보니 너무 추웠단다. ‘아이고, 내가 너무 문을 많이 내린 탓이다.’ 미안한 마음에 차에 시동을 걸어 엔진을 데운다. 날씨가 추워 20분을 공회전하니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 따뜻한 바람이 나오니 다시 잠이 든다. 가엾은 녀석 아빠는 너무 따뜻한 밤을 보냈는데...

        다시 방에 들어와 이불에 몸을 넣고 잠을 청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처량하다. 정말 소를 잡나보다. 건영이가 뛰어들어오며 소를 잡는다고 나한테 나와 보란다. 어릴 때부터 짐승잡는 것을 보면서 자란 탓에 나는 짐승 잡는 것이 전혀 신기하지 않다. 그래도 아들 녀석이 저러니 시늉이라도 할려고 잠깐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린다. ‘아휴, 소를 잡으려면 망치로 한 방에 보내야지. 저렇게 반만 죽은 상태에서 칼질을 하니 소가 바퉁거리지.’ 다시 이불로 돌아가 몸을 누이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옆에 세나가 곤이 자고 있다. 이불을 잘 덮어준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세나가 가장 행복해 한다.

        세나는 작년까지 장거리 여행에서는 항상 제외되었다. 아내가 가면 세나도 같이 갈 수 있지만 장거리 여행을 아내는 힘들어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세나도 빠지게 된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세하가 불평이 많아진 것이다. 작은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이 자주 나온다. 오히려 세나가 인내력이 좋아져 이 번 여행에서 세하가 빠지고 세나가 그 자리를 꿰어차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언니에 대한 승리감에 여행 자체의 즐거움이 세나를 더욱 들뜨게 하는 것 같다. 그런 만족감으로 세나가 곤히 잔다.

        한참을 지나니 밖이 더욱 소란해진다. 부시시 일어나 밖에 나가본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있나 보다. ‘싸이’ 집 옆 마당에 소는 이미 부위별로 나누어져 바구니와 바나나 잎들 위에 놓여져 있다. 한 켠에서는 불을 때 고기를 삶고, 볶고 잔치 준비에 한창이다. 한국의 시골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아이들은 맛난 거 조금이라도 얻어 먹으려 여기저기 서성거리고 흘깃흘깃 낯선 이방인들을 바라본다. 건영이는 그들 사이에서 신기한 눈으로 왔다갔다하는데 누가 라오스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구별이 안 간다. 큰 키만 빼고.

    ‘싸이’집 앞으로 허름한 벽들을 한 집들 사이를 지나 마을 길이 나온다. 그래도 제법 큰 마을이다. 80가구가 있다니 말이다. 구멍 가게도 있다. 세나가 발이 시리다고 해 중국제 양말을 한켤레 4000킵에 사준다. 가게 옆 길 가운데 불을 피우던 자리가 있어 다가가니 사람 좋은 가게 주인 아저씨가 장작 몇 개를 더 가져와 씨불로 불을 피워준다. 앉아서 불을 쬐라고 우리의 사람 수대로 좌대도 가져다 주니 불보다 그 분 마음이 더 따뜻하다.

        이 마을을 방문한 외국인은 우리가 처음인가 싶다. 우리에게 관심이 많다. 이런 저런 것을 나와 죠이에게 물어본다. 특히 라오스 수도에서 온 귀하고 아름다운 처자인 ‘메이’에게 관심이 많다. 드물게 어떤 이는 내가 대부분 알아듣는 말을 구사한다.  대부분 시골은 사투리가 심하거나 라오스 말을 못해 나와 대화가 어렵다. 이 가게 아저씨와는 별 문제가 없다. 한참을 우리 주위에서 서성이던 정말 몽골 아주머니처럼 얼굴이 둥근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니 조금 있다가 고구마와 사탕수수를 내어온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고구마는 이글거리는 불에 넣고 사탕수수는 껍질을 까달라고 부탁한다. 다시 사탕수수를 받아 먹는데 역시 맛이 좋다. 이방인들이 맛있게 먹으니 아주머니께서 감동을 받으셨는지 내 종아리만큼 큰 오이를 가져다 안겨 주신다. 여기 오이는 정말 굵다. 세 개인데 내가 가슴에 안고 가야할 정도다. 장작 사이로 넣은 고구마가 구수한 냄새를 내며 익어간다.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기니 약간 흰색이 돈다. 물기가 없고 달지 않은 고구마다. 그래도 가져다 준 것인데 내색 않고 다 먹는다.

        ‘싸이’가 우리 있는 곳으로 와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단다. 식사 준비는 소를 잡고 삶는 가마솥 옆에 자리하고 있다. 부러 따뜻한 불 옆에서 식사하라고 배려한 것이다. 살짝 데친 내장하고 쇠고기 꼬치 구이다. 그리고 조미료를 듬뿍 넣은 소스와 엄청나게 매운 작은 고추는 반찬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고추는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단촐한 아침식사다. 건영이가 천엽을 먹어보더니 질기단다. 체면에 잘 씹어지지 않은 천엽을 입에 물고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내장은 피한다. 하지만 바베큐는 제맛이다. 단지 소금으로 살짝 맛을 내고 막대기 사이에 끼워 불에 직접 구운 맛이 일품이다. 쇠고기 바비큐를 손으로 주물러 찰지게 한 찰밥에 얹어 먹으면 잘 어울린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런 동네 잔치에 낯선 이방인들이 먹는 모습을 저편에서 동네 사람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식사를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몸집과 인물이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작아 보인다. 인물도 많이 빠진다. 내가 짐작하건데 근친 결혼을 여러 대로 한 까닭일 것이다. 깊은 산골에서 다른 지역 사람들을 접하기는 거의 어려웠을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짐작이 간다. 이 마을에서 건영이가 굉장히 큰 청년처럼 보인다. 또한 나는 거인이란다. 햐...이 곳에 살까보다...거칠고 까만 얼굴, 남루한 옷차림만 보다 위엥짠에서 온 희고 이쁜 아가씨들과 외국인들이 신기한듯 모든 동네 분들이 적의 없이 바라본다.

        ‘나이’와 ‘에’는 어제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한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차가 많이 주저앉았다. 참 부지런한 친구들이다. ‘나이’와 ‘에’는 서로 부족이 다르지만 단짝이다. ‘에’가 ‘나이’를 인도한 것이다. 워낙 말수가 없고 사심이 없는 ‘나이’는 나이가 25살이지만 부끄럼을 잘 탄다. 항상 수줍어 하는 미소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하지만 참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우리 학원에 와서 영어 공부를 하는데 항상 수업 시작 30분 전에 와 눈여겨 봤던 친구다. 어느 날, 학원비가 없었는지 ‘죠이’에게 수업을 먼저하고 후불로 해도 되냐고 하더란다.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했고 우리 학원에서는 토요일에 ‘나이’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소일거리를 만들어 줬다. 워낙 성실한 친구라서 학원에 방이 있으니 거처할 수 있다고 해 작년부터 지금까지 오고 있다. ‘나이’도 역시 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친구로 ‘에’와 같이 국립대 공대에서 IT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 4학년이고 2년 후에 졸업하게 된다. 졸업 후에는 내가 졸업한 필리핀 바기오에서 ‘메이’보다 먼저 가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친구도 후원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


차는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메이’와 ‘죠이’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몽족 파티에 참여한다. 파티라고 해야 특별한 것이 없다. 처녀들과 여자 아이들은 몽족 전통옷을 입고 남자들과 섞여 두 줄로 마주보고 선다. 그리고 테니스공을 던져 주고 받는다. 3,4미터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눈을 마주치며 좋아 한다. 하루 종일 그렇게 한단다. 정말 재미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지만 사랑을 찾는 젊은이에게는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공을 자주 던져 사랑을 표현한다. 아가씨가 공으로 화답하며 호의를 베풀면서 사랑의 씨앗을 싹틔운다. 어떤 경우는 우리나라 옛날처럼 보쌈을 해서 아가씨를 납치하는 경우도 있단다. 납치해서 자기 아내를 삼아도 용인이 된단다. 특히 부모님의 엄명을 받은 ‘무아양’은 적극적이다.      올 해 이 동네 잔치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한다. 그 아가씨도 싫지 않은 눈치다. 나와도 같이 공을 주고받았는데 수수한 시골 아가씨이다. 그래도 화사한 몽족 전통옷을 입고 하얀 분을 얼굴에 바르고 맆스틱까지 하니 제법 예뻐 보인다. 그런 아가씨 두 명이 특히 눈에 띈다. ‘무아양’과 함께 얌전하고 항상 수줍은 웃음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나이’까지 적극적으로 그 두 아가씨에게 대시한다. 같이 사진도 찍고 전화 번호도 따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좋게만 보이지 않아 마음 한 편이 불편하다.

        이곳은 정말 시골이다. 산에서 나물을 뜯고 밭에서 일하며 학교도 초등학교나 제대로 나왔을까 하는 이 아가씨들에게 위엥짠에서 외국인들과 같이 온 ‘무아양’과 ‘나이’는 아주 특별한 청년들이다. 비록 앞 머리가 빠져 성긴 머리칼을 가진 ‘무아양’과 잘 생겼지만 키가 작은 ‘나이’는 수도 위엥짠에서 왔고 소위 말하는 국립 대학(우리 나라 서울대)까지 다니는 전도유망한 청년들인 것이다. 이런 첩첩 산중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까무잡잡하고 떠꺼머리를 한 투박한 청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들인 것이다. 이런 청년들이 휘젓고 다니며 두 아가씨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데 그 아가씨들이 얼마나 흥분하고 기대하겠는가.

        하지만 ‘무아양’과 ‘나이’는 오늘 떠난다. 오늘 떠나 ‘씨앙쿠앙’에 도착하면 또 다른 몽족 도시 아가씨들을 찾아 만날 것이다. 그것도 세련되고 교육 수준도 높은 아가씨들 말이다. 그러면 오늘 오후부터 당장 이 시골 아가씨들은 시시한 시골 처녀로 간주되고 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무아양’이나 ‘나이’에게 “야 파오 더!”(서둘지마라!)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설명한다. 그들도 수긍한다. 그래서 그 아가씨들에게 전화나 채팅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순진한 시골 아가씨들의 마음을 쏙 빼놓지 말라고 말이다.

        이제 처녀 총각들이 제법 많아졌다. 30명은 족히 넘는다. 이들이 두 줄로 나눠 서서 서로 공을 주고받는다. 나도 같이 섞여 본다. ‘메이’는 언제인지 전통복으로 갈아 입고 나온다. ‘싸이’ 엄마 옷을 빌려 입은 것이다. 항상 살짝 미소짓고 있는 이 작고 아담한 아가씨 ‘메이’는 오늘 이 마을에서 꽃 중의 꽃이다. 그런 ‘메이’에게 총각이나 아저씨들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하다.

        공놀이를 하는 중에 동네 연세 지긋한 분이 오시면서 ‘싸이’집이 분주해진다. ‘맛캔’(맛-묶는다, 캔-팔)이라고 손목에 실을 묶는 의식이다. 이것은 한국인 교사들 사이에 논란이 많은 의식이다. 한편은 귀신을 섬기는 제사와 같아서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다른 한 편은 많은 문화 중에 있는 축복 의식의 하나일 뿐이어서 참여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이것은 라오스 크리스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에’는 전자에 속한다. 나는 후자 그룹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일행 모두가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사실 우리 라오스 친구들에게 이 행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릴 때부터 해오던 것이다. 이런 행사에 한 번 참여하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바뀌거나 그러지 않는다. 다만 내게 바램이 있다면 그 의식마저도 그들이 스스로 결단하고 가부간에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잠을 잤던 방에서 상석에 그 동네 어르신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러면 아주머니들이 우리 나라 제사상처럼 상을 준비한다. 그 상 위에 삶은 닭과 조화로 만든 꽃 장식과 술과 쌀을 놓는다. 상이 준비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방과 부엌 가득히 들어 온다. 특별 손님들과 오늘의 주인공들이 돗자리를 편 곳에서 어르신과 마주 앉고 나머지는 대충 알아서 서 있거나 한다.

      자리가 잡히고 동네 어르신이 라오말로 기도를 한다. 사고나 재앙이 없이 장수하기를 빌고,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라는 내용들, 사업에 성공해서 돈도 많이 벌게 해주십사하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악귀도 쫓는다. ‘싸이’는 진지하게 합장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무아양’과 ‘나이’, ‘에’도 같이 있다. ‘메이’도 있다. 10분 정도 그렇게 주문을 외더니 모인 사람들에게 쌀을 뿌리고 술을 뿌린다. 그러면서 어르신이 먼저 ‘싸이’ 아버지와 오늘의 주인공인 ‘싸이’의 손을 실을 묶어 축복한다. 이제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 각자 원하는대로 서로를 축복하며 실을 묶어 준다. 더러는 실과 함께 돈을 묶어 화복을 기원한다. 돈이라야 고작 1000, 2000킵(150원 300원)이다. 어떤 이는 10,000킵을 하기도 하지만 거의 한 명 정도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싸이’이다. 하지만 사람들 특히 아저씨들은 대부분 ‘몽’족 전통복장을 한 아리따운 ‘메이’에게 다가가 실을 매어준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잦아들 즈음 하여 나는 오래전부터 아버지께 아뢰어 준비한 나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어르신께 여쭙는다. ‘당신들이 우리를 많이 축복해 주었으니 이제 우리도 ㅇㅅ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메이’가 옆에서 ‘몽’족어로 동시 통역에 들어간다. 흔쾌한 대답으로 화답해 주어 우리는 일어서서 짧지만 살아계신 ㅇㅅ의 이름을 부르고 축복한다. 이 마을 분들에게, 특히 ‘싸이’의 가족에게 ‘싸이’가 받은 축복이 임하도록. 그리고 그들이 정령 숭배에서 벗어나도록.....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우리의 축복이 끝나고 의식도 모두 끝난다.

     ‘맛캔’의식이 끝나고 방에서 나오면서 ‘메이’는 해맑게 웃는다. 손목에 묶은 돈을 풀고 있다. '메이‘는 우리 영어 학원 경리로 오전에는 ’라따나대학‘에 다닌다. 영어를 전공하고 있다. 오후에는 학원 사무실 일을 돕고 5시에는 아이들 영어를 직접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다. 돈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곧고 지혜롭다. ’몽‘족이고 나이는 이제 20이다. 졸업 후에는 필리핀 바기오에 가서 내가 공부한 학교에 가서 말씀 공부를 할 귀한 재목이다.

        ‘메이’는 필리핀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라오스로 돌아와 작은 시골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나처럼 도를 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박하고 귀한 목표를 가진 친구다. 나는 이 친구가 한국 청년과 결혼해 귀한 일을 했으면 한다. 이런 예쁜 ’메이‘가 돈을 다 정리해서 세어보더니 바로 구멍가게로 가서 맛난 군것질 거리를 사다가 마당에 있는 좌대에 펼치고 동네 아이들을 부른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이들은 눈치만 보고 오질 않자 ’메이‘가 쫒아가 안겨준다. 나는 이런 친구가 미덥다.

        우리의 갈길은 참 멀다. 아쉽지만 정리를 하고 떠나야 할 시간이다. ‘싸이’는 고향을 이렇게 빨리 뜨는 것이 못내 서운해한다. 오후에 갔으면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 틈이 나에게는 없다. 그런 ‘싸이’를 뒤로 하고 짐을 꾸리는데 ‘싸이’ 아버지가 기분이 좋은 모습으로 봉투들을 들고 온다. 그러면서 나와 ‘메이’, 그리고 ‘죠이’에게 전한다. 열어보니 10만킵(만오천원정도)이나 들어있다. 이런 시골에서 상당한 거금이다. ‘싸이’네는 이미 소 한 마리를 잡았기에 큰 돈을 쓴거나 진배없는데 우리에게 직접 목돈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건영이와 세나에게도 4만킵씩을 준다. 그렇다고 무작정 손사래를 치고 거절할 일이 아니기에 조심스럽게 ‘메이’에게 물어본다. ‘메이’는 ‘몽’족 설에 이렇게 돈을 건네면서 서로를 축복한다고들 하면서 받아도 괜찮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만에 세배돈 아닌 설에 돈을 넙죽 받아들고 감사하다고 포옹을 한 번 해준다. 차에 올라 아쉬운 정을 나누며 출발한다. 환송하는 이들이 150명은 족히 되는 숫자다 사방에서 잘 가라고 한다.

        마을에서 가까운 길은 돌들이 많은 험로이다. 내려올 때보다 오르는 길이 더 어렵다. 하체를 튀어나온 돌에 심하게 부딪히면서 돌길을 지난다. 차에서 내려 혹시 기름 탱크가 손상이 되지 않았나 체크한다. 하체는 온통 흙투성이지만 다행 문제는 없어 보인다. 돌길을 지나면서 상태가 좋아지면서 2단까지 넣어 본다. 어제 멈춰서 기다렸던 장소를 뒤로 하고 오른다. 산 고개 마루에 쉽게 와 닿는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잘 포장된 큰 도로가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다.

        꾸불꾸불 산길을 한가롭게 내려가는데 저 아래 큰 트럭들이 줄지어 멈춰 있다. 이제는 아예 차 하나가 어제 내가 헤치고 온 웅덩이 진 길에서 계곡 쪽으로 뒤쪽 바퀴가 무너져 내린 길에 위험스럽게 걸쳐 있다. 웅덩이 진 곳을 피하려 너무 밖으로 차를 몬 것이다. 지반이 약한 부분이 엄청난 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밀리면서 일어난 사고이다. 이층에 쌓여 있던 통나무들이 쇠줄을 끊고 계곡에 쏟아져 내렸다.  벌써 몇 시간이나 사투 벌인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한 뒤로도 한 시간을 땅을 파고 바퀴가 걸린 바위를 쪼아 내어 겨우 빠져 나올 길을 만들어낸다. 쇠줄을 앞차에 걸고 도르래를 이용한다. 앞차가 당기고 빠진 차가 힘을 써 1미터 가량 나오는가싶더니 쇠줄이 끊긴다. 다시 다른 쇠줄을 가져다 연결을 하고 두 번째 시도하니 아슬아슬하게 나온다. 오늘도 우리는 여기서 2시간을 허비한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휴! 집에 갈 수 있구나.’

        예정보다 늦어졌다. 오늘은 온천에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온천은 취소하고 4시가 되어서 돌항아리평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여기까지 오는 중간에도 많은 몽족 처녀들과 총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놀이들을 하고 있다. ‘무아양’은 내리고 싶어 좌불안석이다. 중간에 이 곳이 고향인 ‘까이양’을 만난다. 너무 반갑다. ‘까이양’도 내일 우리랑 같이 내려가고 싶단다. ‘이야’가 내렸으니 그 자리에 앉으면 될 일이다. 다만 짐이 많단다. 쌀을 50킬로 정도 싣고 가려한단다. 위엥짠에 있는 시골에서 온 학생들은 보통 집에서 쌀을 가져다 먹는다. 너무 먼 곳에 있으면 버스로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우리 영어학원에 있는 ‘나이’는 멀리서 온지라 집에서 버스로 쌀을 보내오면 버스 터미널로 그 쌀을 가지러 간다. ‘까이양’은 이 번 명절에 올라온 김에 많이 가져가는 것이다. 이 ‘까이양’은 ‘무아양’이 데리고 온 친구다. 마음이 착하고 키가 큰 친구이다. 법대에서 공부하는 엘리트다. 얼굴은 시골 아저씨지만 아무나 못 들어가는 법대에서 공부한다. 이 친구도 말씀 공부에 참여한다.

        그런 ‘까이양’이 돌항아리 평원 안내를 맡았다. 입장료는 ‘싸이’의 아버지가 건네준 봉투에서 지불한다. 사진으로만 봤던 큰 돌항아리가 널려 있는 ‘돌항아리평원’에 이른다. 아직도 무슨 용도인지 모르는 이 돌항아리들은 사람 키보다도 큰것도 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폭탄에 의해 많이도 깨지고 상처도 많다. 우리는 거기서 ‘까이양’의 형 부부를 만난다. 둘 다 크리스챤이고 이 관광지에서 사진사를 직업을 가지고 있다. 우리를 위해 잠깐 시간을 내어 찍어 주더니 다른 손님들을 찾아 어디론가 간다. 이 항아리 무리는 이 지역에도 세 군데가 있고 다른 곳에 더 있다고 한다. 큰 돌항아리라는 것 외엔 특별한 것이 없다. 아무런 인공물도 보호를 위한 차단막도 없이 있는 그대로 오픈해 놓았다. 너무 자연스럽다.         우리 한국과는 너무 다른 인상이다. 문화재 자체보다는 주변 시설들이 눈에 띄게 현대화되어 오히려 문화재가 퇴색해 보이는 우리의 그것과는 반대다. 그냥 자연의 일부처럼 되어 있어 주변의 억새들과 잘 어울린다. 아마도 라오스의 매력이 이런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돌항아리 평원 구경을 다 마칠 무렵 ‘까이양’이 형이 찍어준 사진을 사람 수대로 인화해 가져와 나눠준다.  상당히 비쌀텐데..... 관광객에게는 장당 10,000킵(1,500원)인데 사진사가 인화하면 1,000킵(150원)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한다. 작은 배려지만 흐뭇한 마음으로 사진 속의 젊은 라오스 친구들을 보며 마지막 코스인 동굴을 둘러 본다. 다시 매표소에 돌아오는 길은 억새가 제법이다. ‘메이’는 그 억새와 예쁘게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느라 우리가 떠나는지도 모른다.

        해가 저물어 간다. 오늘은 ‘싸이’ 삼촌이 자기 집에서 머물라고 했단다. 하지만 아가씨 두 명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잤으면 한다. 여자에 약한 나는 두 아가씨들 의견을 존중해 찾아 보기로 한다. 기왕이면 멋진 곳이 좋겠다고 해 ‘씨엥쿠앙’ 시내 뒤로 있는 동산에 있는 리조트에 간다. 차로 한참을 소나무가 가로수로 서 있는 오솔길을 따라 가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리조트가 나온다. 소나무 숲 사이에 나무로 지어진 오래됐지만 멋진 곳이다. 방값을 물어보니 방 하나에 300,000킵(4만5000원)이란다. 우리는 방이 세 개가 필요하니 150$이나 하는 가격이다.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냥 내려온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없이 ‘싸이’ 삼촌집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돼지고기며 과일을 산다. 우리 먹을 것은 우리가 챙겨야 그 분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을씨년스럽게 밤이 깊어간다. ‘씨앙쿠앙’의 밤은 빨리 온다. 이제 7시 정도인데 가게들 대부분이 문을 닫고 있다. 시내를 지나 어제 잠시 들렀던 집으로 간다. 그래도 한 번 왔었다고 길이 눈에 익다. 차를 마당에 세우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집 안은 맨 땅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차가운 시멘트이지만 돗자리가 여러 장 있어 두 겹으로 까니 그대로 잠자리가 된다.

        일부는 짐을 정리하고 두 아가씨들은 저녁을 준비한다. ‘싸이’의 숙모가 수고가 많으시다. 우리가 가져온 고기나 찬거리를 ‘메이’와 ‘죠이’가 도와 맛있는 저녁을 한다. 요리를 돕는 중에 ‘죠이’가 화들짝 놀란다. 자기 뒤에 죽어 있는 청솔모를 본 것이다. 이 집은 아예 전기란 것이 없다. 어둠 속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시커먼 물체의 정체를 희미한 불빛에 파악한 것이다. 다람쥐보다 더 크고 검은 청솔모는 라오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기이다. 나는 먹어보지 않았지만 맛이 좋단다. 한 마리가 10,000킵(1,500원)이 넘는다니 무게에 비해 상당히 비싼 편이다. 그 청솔모를 ‘싸이’의 숙모는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씻지도 않고 그 손으로 요리를 다시 한다. 부엌은 나무 타는 연기로 가득해 매캐하다.

        한 시간 쯤 식사를 준비하더니 저녁 식사가 다 되었단다. 라오스 밥상은 굉장히 단순하다. 돼지고기와 야채로 국을 만든다. ‘째오’라고 부르는 소스와 대친 야채, 그리고 찹쌀밥. 우리는 숟가락이며 젓가락은 준비해 갔지만 제대로 써볼 기회가 없다. 그냥 손으로 먹는다. 나도 이제는 라오스 사람처럼 먹는다.

        조촐한 저녁을 마치니 ‘무아양’과 ‘싸이’가 아가씨를 만나러 나가고 싶단다. 그리고 시내에서 행사장이 있어 가보고싶다고 두 아가씨도 거든다. 그래서 청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먼저 나간다. 나와 두 아이, 그리고 두 아가씨와 ‘싸이’ 사촌 동생이 안내자로 우리와 함께 나선다. 시내에서 행사장을 찾으니 거의 파장이다. 사람들도 거의 빠져 나갔다. 우리는 팝콘과 삶은 메추리알을 사 먹으며 옷가게 있는 곳으로 간다. 그곳은 아직 철수를 하지 않아 아이쇼핑엔 그만이지만 나는 좀 지루하다.

        청년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아가씨들을 만나고 있다는 연락이다. 아가씨 집에 가서 단체 미팅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청년들 만날 것을 단념하고 ‘푸파랑’(서양산-아마도 리조트가 서양 사람의 것이든지 아니면 서양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부른 듯 하다)으로 가기로 한다. 거기는 유칼리투스가 가로수로 서 있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역시 멋진 소나무 숲에 시내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 리조트다. 분위기가 얼마 전에 본 리조트보다 훨씬 낫다. 밤 10시가 넘어 왔는데 종업원이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친절하다.

        차가운 날씨에 좋은 분위기가 꼭 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물어보니 모두 싫단다. 화장실에 갈 생각 뿐인 ‘죠이’는 마다해서 나와 ‘메이’만 커피를 주문한다. ‘죠이’는 아직 화장실에 가질 못했다고 한다. 이해가 간다. 화장실이 없는 곳으로만 여행을 했으니 볼 일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테니 화장실 가서 볼 일을 보고 오라고 한다.

        커피가 나오기 전에 나는 벽난로에 타다 남은 장작을 모아 불씨를 일으켜 불을 지핀다. 불이 잘 붙는다. 쌀쌀한 이 곳에서 작은 불이지만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 그리고 방금 가져온 커피향과도 더 없이 잘 어울린다. 따뜻한 불 앞에서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는데 사실 맛은 별로다. 쓰기만 하고...화장실에 갔던 ‘죠이’가 온다. 실패란다.

       ‘죠이’는 필리핀에서 나의 친구에게서 훈련받고 파송받은 교사다. 다른 학교로 가면 높은 월급을 당장 받을 수 있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학원에서는 월 200$ 정도 밖에 지급하지 못하지만 지금 2년째 우리 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귀한 동역자다. 실제 라오 청년들과 수업 시작에 접촉해 영향을 미치니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이다. 이런 귀한 선생님이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교육학 석사를 위해 내년 3월에는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청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거의 자정이다. 세나를 내 옆에 뉘이고 건영이가 가에 잔다. 우리는 셋이 같이 자고 내 맡에 발을 향하고 ‘메이’와 ‘죠이’가 자리를 잡는다.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다.


4일 아침

        아침에 일어나니 내 머리 맡에 청년 넷이 잠들어 있다. 어제 늦게 들어온 모양이다. ‘싸이’의 숙모는 아침 준비에 분주하다. 치킨도 잡아 준비한다. 아침은 이 집에서 특별히 준비한 치킨숩이다. 집에서 키운 토종닭이지만 무척 질기다. 나는 씨름을 해서 뜯기가 어려워 소스와 대충 먹는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모임을 준비한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모임을 갖는다. 시내에 모임 장소 두 군데가 있다고 하지만 이 가족과 함께 모임 갖기를 어제부터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이 모임에 ‘싸이’ 삼촌도 같이 참석했으면 한다고 했더니 같이 한단다. ‘에’가 노래를 인도한다. 쉬운 라오어 노래를 고르라고 어제 일러 놓았던 터라 ‘메이’랑 같이 열심히 준비했다.

       ‘무아양’이나 ‘나이’ ‘싸이’는 믿은지 얼마 안 되어 노래를 거의 모른다. 노래가 마쳐지고 ‘에’가 아뢰고 나서 내가 말씀을 전한다. 내가 라오어로 전하면서 이 가족이 이해를 못하면 내 옆에서 ‘메이’가 ‘몽’족어로 추가 설명을 해준다.

       ‘싸이’ 삼촌 가족을 위해 하늘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내용으로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됨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분의 도움이 필연적임을 역설하여 정면으로 도전한다. ‘싸이’의 사촌 동생의 눈이 총총하게 빛난다. 마지막에 하늘 아버지의 아들을 믿으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안타깝게 아직은 믿기 어렵다는 대답이 나온다. 괜찮다. 나도 믿기까지 14년이란 시간이 필요했으니 오늘 처음 좋은 소식에 대해 들어본 사람들이 단숨에 믿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쉽지만 그들을 축복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친다.

        시간으로 볼 때 10시 넘은 지금이 떠나기에 적당하지만 다들 더 있고 싶어한다. 특히나 온천에 갔으면 한다. 온천은 두 지역이 가능한데 여기서 더 멀리 위엥짠 반대 방향으로 75킬로미터 지점과 방비엥 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씨앙쿠앙’에 있는 온천이 더 좋다고 해 온천에 들렀다 가기로 한다. 우리 9명에 ‘싸이’ 사촌동생 두 명이 더 탔다.

        시내에서 펑크 난 타이어를 수리하고 ‘메이’와 ‘죠이’는 시내 게스트하우스에서 방을 구해 샤워를 하고 볼 일을 보고 싶단다. 그래서 방을 마련해 주고 우리는 온천을 향해 떠난다. 날씨는 화창하다. 길도 그만이다. 온천으로 가는 길목에 많은 마을을 지나는데 몽족이 많다. 여기는 분위기들이 훨씬 좋아 보인다. 아무래도 도시 근교여서 그런지 옷 색갈이 더 선명하다. ‘무아양’과 ‘싸이’는 멀미를 핑계대고 내린다. 그 젊은이들의 마음을 알기에 분위기가 가장 좋은 곳으로 선택해 내려 준다. 온천 갔다 오는 길에 다시 만나기로 한다.

        온천 길은 상당히 멀다. 뒤에 탄 ‘싸이’ 사촌 막내 동생이 멀미가 심하다. 두 번이나 쉬었다 간다. 거의 두 시간이 걸려 온천에 다다른다. 하지만 너무 실망이 크다. 노천은 숲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물에 들어가지 못한단다. 그러니 일부러 시간을 들여 갈 필요가 없다. 온천욕이 가능한 곳을 보니 작은 방에 목욕조 두 개가 설치된 것이 전부다. 이 곳에서 샤워만 하고 한 명당 20분에 5,000킵(750원)이란다. 상당히 황당한 가격이다. 마음 가득 실망이지만 가져온 점심을 먼저 먹는다. 하지만 닭고기가 너무 질기고 덜 익어 나와 건영이는  양념으로 쓸려고 가져온 멸치와만 먹는다.

   식사 후에 이렇게 멀리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어 샤워는 하기로 한다. 방을 나눠 잡고 우리 가족이 방 하나를 사용한다. 허름한 욕조가 금방 가라앉을 것같아 발로 두드려 보고 들어가 무지막지하게 큰 밸브를 연다. 쏴!!!! 엄청난 온수가 품어져 나온다. 방금 전 분위기와는 다르게 따뜻한 온천물이 마음과 몸의 피로를 다 씻어준다. 느낌이 참 좋다. 20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여유가 되면 한 시간 정도 했으면 하지만 시간이 빠듯해 대충 옷을 정리해 입고 나온다. 돈을 지불하고 다시 ‘씨앙쿠앙’으로 향한다.

        온천 지역을 빠져 나오는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무슨 일인가 싶은데 옥수수 타작 중이란다. 엄청난 양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통째로 완전히 건조해 지금 기계에 넣어 알갱이만 털어 내는 작업이다. 그 옆에 내가 지나쳐온 대형 트럭이 대기 중이다. 대부분 중국으로 간단다.

        내가 옥수수에 관심을 갖는 것은 2 개월 전에 튀밥 기계를 한국분이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라오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단다. 지난 번에 튀밥 기계를 연습했지만 압력이 제대로 안 되어 전부 실패했다.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해 옥수수가 필요했던 참이다. 킬로당 2,000킵(300원)으로 엄청나게 싸다. 나는 50킬로를 구입해 두 자루로 나누어 차 바닥에 놓는다.

        오는 길은 조금 빨라 1시간 30분이 걸렸다. 돌아오는 길에 ‘무아양’과 ‘싸이’를 데려 왔다. 너무 좋아한다. 예쁜 아가씨 전화 번호도 받았다고 한다. 농담으로 그 시골 아가씨들 생각이 나더냐고 물으니 안 난단다. ‘당연하쥐. 그러니까 너무 정주지 말어. 물론 여기 아가씨들에게도 말야.’ 그리고 조금만 참았다가 위엥짠에서 너하고 비슷한 학적 배경의 아가씨를 찾아보라고 한다.

        ‘씨앙쿠앙’에 도착하니 ‘메이’와 ‘죠이’가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두 시간이나 밖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우리는 ‘싸이’의 두 사촌 동생들을 내려준다. 고등학교 4학년인 동생에게 ‘싸이’형처럼 공부 열심히 해 위엥짠에 오라고, 그러면 내가 도와 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오늘 모임 때에 총총하던 그 눈으로 약속을 한다. 그래 나중에 위엥짠에서 만나자꾸나.

        ‘까이양’은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보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와 같이 ‘위엥짠’으로 떠나기로 약속한 상태이다. 그래서 오늘 오전 8시까지 ‘싸이’ 삼촌 집으로 오기로 한 것인데 보이지 않는다. ‘무아양’에게 물어보니 ‘까이양’ 자신의 짐이 많아 우리와 같이 가기에 너무 미안했단다. 그래서 오전에 먼저 버스로 출발했단다.

        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 달린다. 한 시간 반을 가니 대부분이 멀미를 호소한다. 어느 마을 앞에 차를 세우니 모두 내려 토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후 6시가 넘어 ‘푸쿤’에 다다른다. 저녁을 사먹는데 가격이 두 배다. 해도 너무한다싶다.

        저녁을 먹자 마자 다시 달린다. 그 아름다운 휴게소를 지나쳐 ‘까씨’에 이를 즈음에 온천이 나온다. 캄캄한 밤이지만 많은 차들이 있다. 간이 휴게소다. 차를 세우고 노천인 탕으로 달려 간다. 규모가 제법이다. 깊지 않은데 물이 풍부해 도랑물처럼 온천물이 철철 넘쳐 흐른다. 그 온천에 이 동네 사람들은 멱도 감고 세탁도 한다. 기가 막히다. 온천수로 빨래를 하다니. 나는 바지를 걷고 다리만 담그는데도 피로가 풀린다. 건영이와 세나는 그냥 팬티 바람으로 물로 뛰어든다. 수영을 하고 물장난이다. 너무 좋아 보인다. 온도는 40도가 채 안 되어 오히려 겨울이 없는 이 곳에 적합할 것 같다. ‘메이’는 차멀미에 녹초가 되어 노천탕 한 쪽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 구경만 한다. ‘무아양’은 어제보다는 나은지 온천탕에 발을 담궈보기도 한다. 다음에는 가족들 모두 수영복을 가지고 다시 오기로 하고 위엥짠으로 향한다.

        ‘까씨’를 지나면서 방비엥에 이르기 전에 오렌지를 15킬로 구입한다. 10킬로는 영어학원을 위해서, 5킬로는 우리 가정을 위해서다, 가격이 저렴해서 많이 샀다. 시원하게 씹히는 새콤한 맛이 일품인 방비엥 오렌지다. 차 안에서 마음껏 먹는다.

        싱싱한 오렌지 맛도 잠깐 방비엥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최악의 도로가 우리를 맞는다. 지금이 10쯤이니 앞으로 5시간을 가야 한다. 한 숨만 절로 나온다. 50미터를 채 달리지 못해 파손된 도로가 반복된다. 라오스 정부에 대해 이렇게까지 심하게 투덜대 본 적이 없다. 어찌해서 그 많은 원조를 도로에 투자하지 않는지.....

        휴! 달리다 기다 달리다 기다 하기를 3시간 넘게 해 겨우 ‘푸농’에 와 닿는다. 여기서부터 80킬로만 가면 위엥짠이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게 길에서 당할 고통을 생각하니 멀어도 좋은 길로 맘껏 달리고 싶다. 삼거리에 다다라 위엥짠 방향이 아닌 동양 최대 댐 중에 하나라는 ‘남응엄’ 방향으로 차를 돌린다.  20킬로를 더 돌아가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돌아가도 훨씬 유리하다. 열심히 달린다.

        새벽 1시가 넘으면서 정신이 몽롱해진다. ‘메이’ 동네 앞을 지나면 있는 좁은 다리의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위엥짠이다. 졸음 운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에 ‘에’에게 운전대를 넘긴다. 충분히 잠을 잔 ‘에’를 믿고 눈을 붙인다. 든든한 청년들 생각에 미소를 머금고 잠에 빠진다. 잠결에 아득하게 가로등들이 보인다. 시내를 통과하나보다. 눈에 익은 모습들이 보인다. ‘아이텍’을 통과한다. M포인트마트가 보이고 좌회전 한다. 우리 집이다. 건영이와 세나를 내려 주고 다시 영어학원으로 향한다. 학원에 도착해 청년들과 짐을 내려준다. 모두 서두르는 느낌이다. 우리 짐은 되는대로 차 안에 밀어 넣고는 인사를 하고 몽롱한 상태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도착하니 이 새벽에 큼지막한 세퍼트 두 마리와 아내가 나를 반갑게 맞아 준다. 참 고맙기도 하지. 짐은 차에 그냥 두고 침대에 들어가 그냥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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