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동(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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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역사 (7/14)
유현택 2013-07-18 추천 0 댓글 0 조회 3526

 

 

 

                                  발간사         이성연(주캄 한인선교사회장)


 

서론

 

캄보디아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한국 속담에서 같은 뜻을 찾자면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다. 마치 이 속담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역사 자료들을 뜻을 같이 하는 선교사들이 함께 모아서 총체적 그림을 제공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의미인것 같다.

캄보디아 개신교 선교 90주년과 한인 선교 20년을 두고 지난 90년의 캄보디아 선교역사를 정리하기로 하였다. 세계적인 교회사 학자 케네스 라토렛은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선교역사라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계속 복음을 전파하며 확장되어 왔다.

90년 전, 예수님의 대 위임명령을 따라 캄보디아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우린 그들의 발자취와 수고들 그리고 열매로 세워진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역사를 여기에 서술하고자 한다.

90역사의 서술 방법으로는 다소 전통적이기는 하지만 주로 선교단체와 선교사들의 사역 그리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을 채택하였다. 이를 위하여 간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의 기도편지 및 보고서와 같은 초기 사료들을 참고하였으며, 연대기적 서술로서 90년사를 쓰게 되었다. 역사의 해석은 가급적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서술자들은 기록을 수집하고 이를 시간과 사건 중심으로 나열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책은 한계가 기는 하지만 보다 의미를 둔다면 그것이 영어든지 한국어든지 연대기적으로 지난 캄보디아 개신교회의90년사를 기록한 책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또다른 발전을 위한 작은 디딤돌을 내어 놓는다는데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캄보디아의 근현대사에 큰 요동을 쳤던 수많은 사건들이 캄보디아 교회의 형성과 태동 그리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변곡점들에서 캄보디아 개신교회는 때로는 희미한 불꽃처럼 사라질 위기도 있었고, 반대로 다시 활활 타오르는 시기도 있었다.

첫 번째 부분은 1923년에서 1970년까지로 나누었다. 이 기간은 전체 90년 역사의 반 이상인데, 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과 C&MA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역의 전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있었던 몇몇 어려움들을 서술하였다.

1923년 입국한 아더 하몬드와 에스더 하몬드(Arthur & Esther Hammond) 부부가 캄보디아에 들어온 공식적인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다. 하지만 그 보다 훨씬 이전인 1555년도에 포르투갈 출신의 가스퍼 다 크루주(Gaspar da Cruz) 카톨릭 수사가 캄보디아에 들어와 처음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다. 더 나아가 이미 4-5세기에 시리아의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하여 기독교인들이 이미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그러한 주장들이 역사적 고증을 동반한 주장인지 살펴볼 것이며 개신교 이전의 카톨릭의 역사 또한 여기서 기술하였다.

1923년 하몬드 선교사를 보낸 미국의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는 일찌기 인도차이나 반도를 개척 선교지로 분류하고 최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지역으로 선정하여 선교사를 보냈다. 그리하여 1911년에는 베트남에 그리고 1923년에는 캄보디아에 선교사를 보내었다. 사실 1923년부터 1970년까지 캄보디아 선교의 역사는 C&MA 선교회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MA 선교회는 그 태동과 더불어 선교 정책과 전략을 통하여 캄보디아 개신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사역은 주로 교회 개척과 성경 학교, 성경 번역, 소수부족 사역 그리고 문서 사역이었다. 선교회에서 내세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캄보디아 교회의 자립이었다. 재정적인 자립을 원칙으로한 선교회의 정책은 캄보디아 개신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캄보디아 개신교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 중의 하나가 외부에 대한 의존도 (Dependency)이다. 이는 단지 재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이런 현상이 과거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추측하는데 그런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 자립의 속도는 느렸지만 선교사나 교회의 자립에 대한 의지는 적어도 1970년 전까지도 분명했던 것 같다.

두 번째로는 1970년에서 1990년까지의 기간을 서술하였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 지배가 끝나갈 무렵에 소개된 공산주의는 인도차이나 전역을 전쟁으로 휩쓸었다. 1960년 대 말부터 내전으로 치닫는 캄보디아는 1975년 앙코르제국의 옛 명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내세운 크메르루즈 공산당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에 교회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열매를 얻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교회가 거의 사라질 위기를 만나기도 하였다.

전쟁은 온 나라를 소용돌이로 몰아갔는데, 그런 변화에 어찌 할 바를 몰랐던 캄보디아인들에게 기독교는 평안과 위로를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외래 종교라 치부하며 배척하였는데, 주로 지식인 층에서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그래서 1923년부터 1970년까지 기독교인의 숫자보다 1970년에서 1975년까지 기독교인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고백한 어느 현지 지도자의 말처럼 캄보디아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지옥과 같은 곳으로 변했다. 이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도 나왔다. 암흑과 같은 크메르루즈의 4년 통치 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 곧 베트남 공산정부가 들어섬에 따라서 기독교는 여전히 금지되었지만 하나님의 역사적인 섭리하심으로 수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이 피난 하였던 태국의 피난민 촌에서 캄보디아 교회는 여전히 살아서 복음을 힘차게 전하였다.

마지막 시기는 1991년부터2013년 현재까지이다. 1991년 파리평화조약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면서 새 헌법이 공포되는데, 그 곳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었다. 이는 캄보디아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전후 복구를 위해 수 많은 기독교 NGO들이 물밀듯 들어오고, 선교단체들도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피난민 캠프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 고국으로 들어오면서 교회를 시작하고 교회의 리더가 되었다. 또한 매서운 감시 가운데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던 교인들은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며 그들도 자연스럽게 캄보디아 교회의 지도자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피난민 캠프에서 지내야했던 일부의 캄보디아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새롭게 거주한 나라의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고 선교사의 신분이 되어 캄보디아 교회 지도자 그룹의 한 부분을 맡게 되었다.

1991년부터 2010년까지 캄보디아 교회는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다보니 수 많은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지도자들의 자질부터 시작해서 연합의 불일치까지 제반 문제들이 현재형으로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에 부록으로 2010년부터2011년까지 168명의 캄보디아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현황을 첨부하였다. 90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성장해온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현재 모습을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비록 그 과정 가운데 어려운 부분을 수반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의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이 자료들은 현재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약점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캄보디아 개신교회와 선교사들이 이를 겸손하게 수용하고 앞으로 교회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돌아볼수 있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20년 동안 급성장한 캄보디아 개신교회는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다. 무엇보다 교회의 연합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됨을 회복해야 한다. 기대하기는 캄보디아 개신교회들이 개신교 선교 90년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이하면서,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고 그것을 거울삼아 서로가 연합에 이르는 답을 얻는데 본 작업이 일조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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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선교의 여명과 태동

그리고 발전기(1923-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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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이전의 캄보디아를 향한 복음의 발자취들: 네스토리안과 1923년 이전의 기독교 선교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가장 먼저 캄보디아를 찾아온 사람들은 네스토리안 선교사라는 주장이 있다. 이를 가장 먼저 제시한 사람은 캄보디아 개신교 초기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데이빗 엘리슨(David Ellison) 선교사의 아들인 폴 엘리슨(Paul Ellison) 선교사이다. 그는 연구 끝에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베트남뿐 아니라 캄보디아까지 왔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문화에는 인도차이나 지역에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후 450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있었던 네스토리안교회 총회에 인도차이나 지역 대표가 참석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엘리슨에 따르면 이 총회에 대표를 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70,000명의 신자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엘리슨은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시리안 선교사들이 초대교회사 시대에 인도차이나 지역에 활동하였음 강하게 나타낸다고 믿었다. 예를들어 몬크메르족의 소수 부족안에 있는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들 그리고 홍수의 설화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 캄보디아 시골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의미나 내용을 설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내 쫓기 위해 집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놓은 것과 같은 것들이다. 또한 원래는 베트남 중부 지역을 기원으로 하는 무슬림들인 참족의 고대 용어에서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의 용어가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 하였다. 그는 초기 기독교의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초기에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오늘날 그 존재감이 없어진 것은 부정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 이유는 성경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하지 않았고 토착화된 리더를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엘리슨의 의견을 뒷 받침할만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해도 간접적인 고증들은 있다. 우선 8세기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당시 수도인 서안에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단지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활동을 하였다고 인도 출신의 교회사 학자인 존 잉글랜드(John England)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6세기까지 우리는 스리랑카와 트르쿠스탄(Turkestan)으로부터 온 십자가와 묘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8세기의 고비 사막 서류들(Sian-fu-stele), 중부 일본에 있는 묘비들, 러시아 투르크스탄의 벽화와 서아시아로부터 온 시리아 문학 작품들도 있다. 특별히 인도 남부와 중국 서부 지역에 남아 있는 글들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3 백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더 많은 십자가 유품과 묘비들이 키르기즈스탄과 중국 중부와 북부에서 발견되고 버마와 말레이에서도 유물들이 발견된다. 또한 기독교 활동에 대한 당시의 필사본들이 시리아에서 이란, 인도, 인도차이나에서 발견된다.”

위 사실에 근거한 또 다른 간접적 증거가 될만한 것으로는, 아마도 네스토리안 선교사들 스스로가 무역상의 일을 하였고 당시 캄보디아도 중국이나 인도 지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였기에 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에 1500년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 한국명 마포삼열)은 역사적으로 고증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캄보디아와 가까운 태국은 몽골제국 시대에 태국의 북쪽 치앙마이와 수코타이에 두 왕국이 있었는데 이 두 왕국은 몽골제국과 친밀하였다. 그리고 1350년에 새로운 강력한 왕국이 아유타야에 세워졌는데,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온 무역상들과 그리고 네스토리안들과도 교류가 있었지만 기독교회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마도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의 왕래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포교 활동으로 옮겨지고 기독교 공동체가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만한 역사적 고증은 다소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고증에 의하면 캄보디아 최초의 기독교 선교는 1500년 이후 카톨릭 선교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한편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의 시대부터 유럽 개신교 국가는 식민지 쟁탈과 함께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선교사를 보냈다. 하지만 카톨릭이 국가의 주류인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인 인도차이나는 그만큼 개신교 선교사의 입국이 어려웠고 더뎠다.

인도차이나 지역에서도 버마(지금의 미얀마)1813년부터 미국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에 의해 복음 전도가 시작되었고 태국은 1828 년에 시작되었다. 그에 비하면 당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은 1911년에 캄보디아는 1923년에, 이러한 지역에 비해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선교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문이 열리기까지는 일련의 많은 시도가 있었다. 태국에 와있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기도하면서 정부에 청원을 하였지만 그 때마다 거부 당하였다. 영국의 성서공회는 1890년대에 서적 판매를 하는 호주 출신의 선교사를 보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추방을 당했다. 그것은 종교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이집트의 나일에서 프랑스와 영국과의 충돌이 그를 추방하게 한 것이다.

1911년부터 태국의 방콕에서 미국성서공회 소속으로 일하던 로버트 어윈(Robert Irwin) 선교사는 캄보디아를 방문한 이후 캄보디아에 대한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동양 선교사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OMS International)를 만들었던 카우만(William Cowman) 목사에게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그 요청을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캄보디아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하였다.

 

카톨릭 선교

 

1555년 앙찬(Ang Chan)왕의(1516-1566) 통치가 거의 끝나 가던 시절, 포루투칼 도미니칸 수도회 수사인 가스퍼 다 크루주(Gaspar da Cruz)는 당시의 수도인 롱벡(지금의 깜뽕스프의 우동 지역에 가까운 곳)에 나타났다. 그는 말라카(현재 말레이시아에 위치한 말라카)에서 항해하여 피엄(지금의 베트남 하띠엔 지역)에 정박을 하고 메콩강을 따라 거슬러 롱벡에 도착했다. 1년 동안 어떤 개종자도 없자 그는 캄보디아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떠나면서 사람들의 미신적 관습과 불교 승려에 대한 충성 때문에 개종이 어렵다는 이유로 떠났다. 그 이후 1574년 같은 선교회의 또 다른 수사인 실베스터 드 에저베이도 (Sylvestre d’ Azevedo)는 캄보디아에 도착하여 15년을 머물렀다. 초기에는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왕으로부터 호응을 얻어 교회 건물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캄보디아인의 세례는 허용되지 않았다. 1585년에 3-4명의 카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 왕으로부터 자유스럽게 카톨릭의 신앙을 전파하는 것에 허락을 받았다. 자유로운 포교의 허락에 힘입어 실베스타 디 에저베이도는 말라카에 몇 명의 선교사 파송을 청원하는데, 두 명의 선교사가 들어 온 후로 디 에제베이도는 처음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보여주는 책을 이들과 함께 만들어냈다.

시암(Siam)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섭정왕을 내세운 이후 캄보디아의 왕정은 혼동에 빠지는데, 그 때쯤 해서 일본으로부터 핍박을 피해 도망나온 일본인 카톨릭 신자들이 롱벡 근처에 정착했다.

1650년에는 또 다른 카톨릭 그룹인 포르투갈 사람 및 그들과 혼혈된 자손들이 우동(Oudong) 근처에 정착했다. 사실 프놈펜 근처의 베트남 사람들은 안남 지방에 왔던 예수회 출신의 신부들에 의해 전도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 했는데 핍박을 받게 되자 캄보디아로 피하여 온 사람들 이다. 포루투칼 카톨릭 신부들이 시작한 카톨릭 선교는 포르투칼이 쇠퇴하고 프랑스가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프랑스 카톨릭이 캄보디아의 카톨릭 선교를 맡게 되었다.

18세기 중반이 되서야 캄보디아의 가장 큰 종족인 크메르족에게 포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1863년에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에 들어가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맺는 과정에는 방콕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캄보디아어도 구사하는 비숍 미체(Bishop Miche)가 당시의 캄보디아 국왕인 앙 두엉왕과 프랑스 정부의 특사 역할을 했다. 이 조약으로 카톨릭은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포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19세기와 20세기, 카톨릭은 핍박을 받게 되는데, 이는 종교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이유에서였다. 반식민지 운동이 일어날 때 그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카톨릭이었고 또한 베트남과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캄보디아 카톨릭 신도의 주류를 이루었던 베트남 사람이 있는 카톨릭 성당이 타도 대상이 되었다.

카톨릭 선교 사역은 근 500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전개되었지만 캄보디아인들에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카톨릭 신자들의 대부분이 캄보디아 원주민과 분리된 외국인들이 었고 이들은 자기들만의 지역 사회를 구축함으로, 실상은 단절된 상태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데 일조한 것이 카톨릭이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그래서 프랑스 식민정부와 이미지가 겹치는 것이 카톨릭이었다.

 

                                              2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와 인도차이나

 

캄보디아 개신교 선교 90년 역사에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단체가 있다면 그것은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선교회일 것이다. 캄보디아에 가장 먼저 개신교 선교사를 체계적으로 보내었고, 1970년대 초 다양한 단체들에 소속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50여년 동안 캄보디아 선교를 도맡아서 해온 단체이다. 지금의 모든 캄보디아 개신교회와 선교는 어떻게 보면C&MA선교회의 수고를 기반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이 선교회는 다른 단체들이 복음의 문이 닫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마침내 그곳에 선교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영적인 거장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C&MA 선교회의 창시자인 알버트 심슨(Albert Benjamin Simpson)이다. 그는 1844년 캐나다의 프린스 웨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엄격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청교도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유청소년 시절 그의 섬에 선교사로 왔던 존 게디의 영향으로 영적인 각성을 하게 되었다. 이후 토론토에 있는 낙스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해밀톤에 있는 교회에서 8년 동안 목사로서 사역하였다. 1873년도에 미국 켄터키 주의 루이스빌에 있는 장로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그 곳에서 보다 적극적인 전도 운동에 눈을 뜨고 참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뉴욕 13번가의 교회로 청빙을 받아 가는데, 새로운 이민자로 붐비는 당시의 뉴욕에서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였지만 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마침내 새로운 사역으로의 전환 계기를 맞이하였다.

심슨의 생애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두 가지의 비전이 있었는데, 첫째는 그의 메세지에서 모든 교리는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분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4(Fourfold) 복음이라 불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심(Jesus Christ Our Savior)과 성화(Sanctified), 치료자(Healer) 그리고 재림(Coming King)으로 구성된다. 둘째는 멸망해가는 세상과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었다.

선교회가 태동되던19세기가 끝나갈 즈음에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 안에 몇 가지 운동들이 있었는데, 이런 운동들이 선교회의 교리와 정책 그리고 선교회의 해외 선교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영향들을 보면 첫째 복음주의 운동의 대규모 집회와 회심이었다. 찰스 피니(Charles Finney)를 시작으로 디엘 무디(Dwight L. Moody)의 복음주의 운동이 19세기 말, 전 미주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둘째로 거룩함(holiness)’의 운동은 유럽과 미국에서 영향을 미쳤는데, 죠지 뮬러의 성령과의 깊은 교제를 통한 거룩한 생활 등이 대표적이었다. 세 번째는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받는 신유이었다. 네 번째로는 해외 선교였다. 그러한 예로 윌리엄 캐리, 허드슨 테일러 등 많은 믿음 선교(Faith Mission) 단체가 생겨났다. 다섯 번째로는 예수님의 재림이었다. 한 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세기가 오면서 전천년설의 종말 사상에 재림 신앙이 강조 되었다. 이 다섯 가지는 심슨 개인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선교회의 가르치는 바요 증거하는 바였다.

C&MA선교회의 시작은 당초 교단으로서 시작된 것은 아니고 두 개의 선교 단체로 시작되었다. ‘The Christian Alliance’는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성장에 촛점을 두었고 ‘The 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는 성별된 (Consecrated) 성도들을 해외 선교로 동원하는데 촛점을 맞추었다. 두 단체는 1887년에 통합하여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선교회가 되었다. 처음 내세웠던 선교사 사역의 구별된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전천년적인 종말론의 관점에서 일한다. 우리가 믿기는 그 분의 재림을 재촉하는 일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둘째, 우리는 완전하게 성별되어진 선교사를 찾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 해서 받고 성령의 감독하에 우리의 사역을 진행해 감을 강조한다.

셋째, 모든 일은 믿음의 일이 되어야 하고, 기도의 영으로 유지 해 가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

넷째, 선교사들은 조직적인 또는 교육 사역보다는 보다는 직접 공격적이고이고 복음적인 사역을 한다.

다섯째 우리는 복음이 아직까지 미치지 않는 최전방을 필드로 삼으며, 우리의 선교사는 가장 힘들고 미지인 사역지로 들어간다.

여섯째, 선교사의 삶은 단순화되어야 한다.

일곱째, 희생의 정신은 우리 사역의 원동력이 되는 가장 깊은 요소이다.

선교회는 이 원칙 아래 1887년 선교회를 세우자마자 인도로 첫 선교사를 보내고, 복음이 미치지 않는 최전방 지역을 찾게 되었다. 무엇보다 선교회의 창시자는 그러한 지역으로 인도차이나를 언급하였다.

1882년 심슨에 의해 발행된 월간지 ‘The Word, The Work and The World’에 처음으로 인도차이나가 언급되었다. 그는 같은 잡지의 18872월 판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시아의 동남아 반도는 무시되어 왔습니다. 안남 대제국은 그리스도로 가득 차야 합니다. 티벳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롭게 공략해야 하는 초기 선교지로서 기대가 됩니다.”

1892년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바울의 위대한 야망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는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교사들에게 여전히 알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중국의 900개 시와 아프리카에 있는 300-400개의 종족 그리고 티벳, 중국, 안남, 캄보디아 등에 누가 가겠습니까

구체적으로 1893 년에 데이빗 라라췌르(David LaLacheur) 목사에게 인도차이나에 대한 사전 조사 여행을 부탁하였다. 라라췌르 목사는 싱가폴을 경유하여 안남의 사이공을 다녀와 그에게 보고하였다.

심슨은 남중국과 인도차이나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고 남중국을 통해서 인도차이나로 들어가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1896년에 뉴욕에서 몇 명의 선교사가 남중국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그 중에는 23세의 로버트 제프리(Robert A.Jaffray) 선교사도 있었다. 그들이 정착 한 곳은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 광서 지역이었다.

많은 어려움 끝에 마침내 1911, 베트남 중부의 다낭에 선교 베이스를 세움으로써 선교회의 인도차이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1918년에는 사이공에 베이스를 정함으로 코친차이나(지금의 베트남 메콩델타 지역)에서 사역이 시작되었다. 제프리는 당시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코친차이나와 이후에는 캄보디아가 반드시 선교사가 들어가야 할 곳으로 지정하였다. 그는 19202월 죤 올슨(John Olson) 선교사와 함께 캄보디아를 방문하였다.

그가 선교회 중에서는 캄보디아를 처음 방문한 선교사로서 본국에 보고된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총독이 여기에 있고 거주하여 사업하는 사업가들도 있다. 세상에 잘 알려진 활발한 광동성에서 온 중국 상인들도 여기에 있다. 도시의 거리에는 많은 국적의 남녀들의 무리로 차 있다. 모두들 일상 생활로 분주하다. 카톨릭 교회의 사역이 눈에 띈다. 하지만 순수 기독교인의 복음을 대표할 대표자는 아직까지 캄보디아에서 볼수 없다.”

1920년 인도차이나 지역의 선교사 컨퍼런스에서 두 명의 선교사를 문이 열리는 대로 즉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922년도에 어윈 선교사와 하몬드 선교사가 프놈펜을 방문했는데, 그 때에 캄보디아의 프랑스 총독으로부터 선교사의 입국 허락을 받고 19231월 말에 아더 하몬드(Arthur Hammond) 선교사 가정이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입국하여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캄보디아 지역 내에서 선교회의 사역은 1923년부터였지만 선교회는 이미 코친차이나 지역에서 1921년부터 캄보디아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해왔다. 1921년 정기 컨퍼런스에서 제프리 선교사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잭슨(H.A Jakson) 선교사는 껑터(Cantho) 지역을 오픈하고 그루페 선교사는 짜우독(Chaudoc) 지역을 오픈한다. 도시 내와 주위의 시골 지역에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가 캄보디아에 들어가기 전에 복음의 메세지가 이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이 된 사람들이 나중에 1926년 즈음에 바탐방으로 이주하여 짠두스바라는 지역에 거주하며 신앙생활을 해 나갔다. 그래서 킬링필드 리빙필드의 저자 돈 코멕은 그곳을 캄보디아 기독교의 묘목판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1923년 캄보디아에 들어온C&MA선교회는 1962년까지 총 28가정(부부 22가정과 독신 6가정)을 통하여 캄보디아 내 여러 곳에서 사역하였다.

1923년에 하몬드 부부는 프놈펜을 중심으로 사역하였고 데이빗과 뮤리엘 엘리슨은 바탐봉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1926년에는 피터슨(Floyd & Lenore Peterson) 부부가 캄보디아에 들어왔으며 프놈펜 지역에 배치받았다. 이들은 나중에 깜뽕뜨라(Kompong Trach) 선교 베이스를 구축한 이후 그곳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1927년에는 건터(Paul & Sigrid Gunther) 부부가 바탐봉 지역으로 배치받고 그 곳에서 언어 공부를 한 후, 나중에 시암(지금의 태국) 동쪽인 이산 지방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1928년에는 크레스만(Norman & Ethella Cressman) 부부가 입국하여 언어를 배웠다.

1929년에는 스미스(Gordon & Laura Smith) 부부가 입국하여 프랑스 식민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아 크라체 지역에 선교 베이스를 구축함과 동시에 그 곳에서 언어를 배웠다. 그들은 그곳에서 소수 부족인 프농(Phnong)족과 스티엉(Stieng)족을 대상으로 사역하다가 1934년도에 베트남의 중부 반메툭(Banmethout) 지역으로 옮겨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1930년대에는 단지 두 가정이 캄보디아에 들어오는데 아마도 이는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선교사 숫자의 감소를 가져 온것 같다.

1937년에는 세크리스트(Harold & Magrerite Sechrist) 부부가 캄보디아로 배치를 받고 프랑스에서 언어 공부를 마친 후에 캄보디아에 입국하였다.

1939년에는 테일러(Harry & Miriam Taylor) 부부가 깜뽕짬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일본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필리핀에 잠시 철수했다가 그곳 수용소에 갇혀 나중에 전쟁 기간 동안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들은 캄보디아에서 철수한 후 레바논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1940년대에는 네 가정과 한 독신 선교사가 입국 하였는데, 1945년에 독신인 딘(Dean F.)1947년에는 스타이너(M. Bliss &Virginia Steiner) 부부와 도티(Joseph & Paula Doty) 부부가 1949년에는 그레븐(Merle & Louisa Graven) 부부가 캄보디아로 선교지를 배속받았다. 그레븐 부부는 1955년에 프놈펜에 미국 대사관 직원들 중심으로 세워졌던 인터네셔녈 교회의 담임 목사를 맡았다. 또 그레븐 선교사와 같은 해에 톰슨(Edward & Ruth Thompson) 부부가 캄보디아로 오게 되었다.

이들은 1955년부터 크라체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데 특별히 므농(Mnong) 부족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고, 1965년에는 캄보디아 정부의 미국 선교사 추방으로 베트남 중부에 있는 므농 부족들에게로 사역지를 옮겨 사역하였다. 19681, 그들이 살고 있는 반메툭(Banmethout) 지역에 베트공이 들어와 다른 다섯 명의 선교사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1950년대에는 복음 전도가 보다 자유롭게 되어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5가정에 두 명의 독신 선교사가 캄보디아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51년에 던닝(Bernard & Edythe Dunning) 부부가, 1953년에는 독신 선교사 멕카트(Lavinia McCart) 선교사가 그리고 1954년도에는 엘리슨(John. Paul & Ellison) 부부가 들어왔다. 폴 선교사는 캄보디아 개신교 초기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데이빗 엘리슨 선교사의 장남으로서 부모에 이어 캄보디아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메콩델타 지역의 캄보디아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다 이후에 크마에 러으지역의 캄보디아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다. 1965년도에 캄보디아 지역 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추방 당하면서 도티 부부도 이 사역에 합류했다.

또 같은 해에 홀튼(Henry & Florence Holton) 부부는 캄보디아로 사역지를 옮겼다. 원래 이들은 1937년에 중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에는 베트남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다 1954년에는 캄보디아에 있는 중국인 사역을 위하여 입국했다.

1955년에는 독신의 로라보우(M.L. Rorabaugh)가 캄보디아에 입국했으며, 1956년에는 세 가정이 캄보디아를 선교지로 정하고 들어왔다. 브렐리(Leonard & Bonnie Braley) 부부와 퍼니스(Donald & Furniss) 부부와 끝으로 웨스터그렌(Cliff & Marlene Westergren) 부부가 들어 왔는데, 특별히 웨스터그렌 선교사 중의 한 자녀인 스티븐 웨스터그렌은 지금도C&MA 선교회 소속으로 캄보디아에서 일하고 있다.

1957년에는 롤란드(J.R. Roland) 선교사가 독신 선교사로 입국했다.

1960년대에는 1965년 캄보디아 정부가 반미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 선교사에 대해 더 이상 비자를 내어 주지 않는 관계로 일시적으로 철수했던 적도 있었다. 이 때에는 5 가정과 2 독신 선교사의 입국 있었다.

1960년 엥(Norman & Marie Eng) 부부가 캄보디아에 배치를 받아 1961년에 캄보디아에 입국했다. 이들은 1965년 선교사 철수 이후에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다 프랑스에 있는 캄보디아인 교회의 담임 목사인 웅 다비(Ung Davy)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를 대신하여 그곳에서 목회를 했다. 노먼 선교사가 소천한 이후에는 마리에 선교사가 90년대 말에 캄보디아로 다시 돌아와 AIDS환자들을 부모로 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Place of Rescue’를 열고 그들을 지금까지도 돌보고 있다.

또 클라바우드(Jean & Roselyn Clavaud) 부부도 같은 해에 입국했는데 이들은 프랑스 국적을 가진 선교사로서 1965년 선교회의 모든 미국 선교사들이 철수했을 때에도 프랑스 국적을 가졌던 덕분에 철수를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4년 동안 선교회의 남은 유일한 선교사로서 현지 교회를 돌보았다. 1970년에는 따께오에서 크메르루즈에게 아들과 함께 납치되어 잠시 잡혀있기도 했다. 1980년에는 친베트남 공산주의 정권에서 클라바우드 선교사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일원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당시의 지하 교회 교인들과 연락을 취하고 그들에게 TEE를 비롯한 여러 문서와 교재들을 가져다 주기도하였다.

1961년에는 두 가정과 한 독신 선교사가 본부에서 캄보디아로 선교지 배치를 받았다. 독신인 멕고너글(Barbara. R. McGonagle) 선교사와 홀(Eugene & Carol Hall) 그리고 테일러 (Donald & Janet Taylor) 부부가 있었다. 테일러 부부는 1938년부터 캄보디아 선교사로 있었던 헤리 테일러 선교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1963년에는 독신인 엘우드(S.A.Elwood)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1965년 선교회가 철수 할 때, 734명의 세례자를 포함해 그리스도인은 약 2,000명에 불과하였다. 폴 엘리슨 선교사의 회고록에 보면C&MA선교회의 부총재인 킹(L.L.King) 박사는 선교회가 사역하는 나라 중 아랍 지역을 제외하고 복음을 가장 거부하였던 나라가 캄보디아라고 말하였다.

C&MA선교회가 캄보디아에서 사역할 때에 다른 선교지와 다른 특성 중의 하나는 교육 기관이나 병원 등 사회개발 사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선교사들이 들어 가기 시작한 신생 선교지에서는 대 부분이 학교나 병원을 세우는 것을 주요 선교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간 중국은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예를 들어C&MA선교회가 영향을 받았던 허드슨 테일러의 CIM(China Inland Mission) 선교회도 1900년 까지 133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한국에 온 북미주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선교의 시작은 직접적인 복음전도 이전에 제중원을 시작으로 한 의료사역과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물론 이는 당시의 조선이 선교사들을 받아 들이면서 그들의 사역을 교육과 의료에 국한시킨 이유도 있다). 1909, 한국 전역에는 950개의 기독교 학교가 있었던 것만 보아도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 사역에는 이러한 의료 사역과 교육 사역이 큰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캄보디아와 가까운 태국에서도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학교가 세워졌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지가 그러한 흐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캄보디아에서는 순수 복음 전도만을 고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당시 C&MA선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을 교단의 신조 중의 하나로 믿고 실천에 옮겼다. 선교회의 선교 정책에서도 복음 전도를 우선시하며 교육 또는 의료 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다. 이 정책은 다소 흥미로운 부분이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세대주의적 전천년 설은 당시 미국 사회의 불안정한 면들을 반영한 것으로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조의 영향을 받도록 하였다.

후천년설(Postmillenialism)이 다소 인본주의적이며 사회 복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반면에 전천년설은 철저 하게 개인의 구원에만 초첨을 맞추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주의자들은 성경훈련을 조건으로 하되 자유주의적 예술 교육과 기독교적인 정치, 경제, 사법 제도의 설립은 엄청난 시간의 소비라는 생각을 하였다. 거기에는 가정(假定)이 있는데 기독교인 대중을 포함해 모든 인류는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기독교인들이 세운 기관까지 포함 해서 모든 세상의 기관들은 새로운 천년왕국을 위해 정리된다고 주장하였다.

C&MA 선교회의 창시자인 심슨은 다른 세대주의와 다름없이 세상은 마치 침몰해 가는 배와 같고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런 배에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개인의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은 선교지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선교지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 등에 대해서 심오한 고찰이 없었다. 1923년부터 1950년까지 선교회의 현지 선교사들이 발행한 간행물을 보더라도 그러한 노력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캄보디아의 외교 관계를 기술한 클라이머도 이 부분을 언급하였다.

선교사들이 기록한 기록물에는 정치적인 부분이나 사회 문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단지 당시 프랑스 식민정부가 인도차이나 지역에 해 놓았던 몇 가지 유익에 대한 작은 언급이 있을 뿐이었다.”

이는 오직 개인 구원에만 사역의 초점을 맞추고 캄보디아인들이 살고 있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세는 선교지를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바른 태도가 아님을 선교 문화 인류학자 폴 히버트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복음주의자로서 우리는 성경의 지식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가 섬기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점검해 보려는 시각은 거의 갖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메세지는 흔히 잘못 이해되어 외래적인것으로 간주된다.”

 

 

3

 

캄보디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캄보디아에 개신교 선교사가 여행이나 일시적인 방문이 아닌 당시의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장기적으로 거주하며 선교 사역을 펼치기 위해서 캄보디아에 들어온 해가 1923년이다. 이 해에 두 가정의 선교사가 들어 왔는데 첫 번째 가정이 아더 하몬드(Arthur L. Hammond)” 가정과 데이빗 엘리슨(David Ellison)” 가정이었다.

 

아더 하몬드(Arthur L. Hammond)

 

하몬드 선교사는1896813, 미국 동부 뉴욕주의 시라큐스(Syracuse)에서 출생하였다. 1915빌리 선데이(Billy Sunday)”전도 집회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아울러 주님을 위해서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하였다. 사실 그의 회심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를 주님께서 응답하신 것이었다. 그는 그 이후 군대에 들어가 남부 텍사스의 멕시코 국경 지역에서 근무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나약 성경학교(Nyack Bible Collage)에 가려 했지만 재정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아 주저하던 때에 군대에서 재소집이 있었고 곧 이어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캄보디아를 선교지로 갈 것인가는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참전 경험이 캄보디아를 선교지로 결정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19년 미국으로 돌아온 하몬드 선교사는 그 해에 C&MA에서 세운 나약 성경학교(Nyack Bible Collage)에 들어 가게 되었다. 가야 할 선교지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에게 중국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선교지였기에 주님 어느 나라든지 그러나 중국만은……과 같이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당시C&MA선교회의 남중국 필드의 책임자로 있었던 제프리 박사(Dr. Jaffray)와의 만남이 캄보디아를 선교지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여름 방학 중 빙헴턴(Binghamton)에서 뉴욕주의 교회연합 수련회로 제프리 박사가 강사로 왔는데, 그 수련회에서 선교 헌신자로서 선교지를 위해서 이야기 하던 중에 하몬드 선교사가 프랑스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된 제프리 박사는 그 에게 인도차이나 지역에 선교사를 구하고 있는데 그 곳으로 지원하는 것을 권유하였다.

학교로 돌아온 하몬드 선교사는 한 장의 전단지를 받아 보는데 그 전단지는 캄보디아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전단지를 보면서 그는 결국 캄보디아를 선교지로 가게 될 것을 결정하였다. 그는 그 학교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에스터 킹(Esther King)을 만나 약혼을 하였다. 2년의 과정을 마치고 19219, 미국을 출발하여 캐나다의 벤쿠버에서 배를 타고 홍콩을 경유하여 당시 C&MA 선교회의 남중국 필드 사무실이 있던 우초우(Wuchow)에 도착하여 제프리 박사를 만났다. 며칠을 머무른 후에 홍콩에서 배를 타고 19211029, 사이공 항구에 도착하였다.

당시 사이공은C&MA 선교회의 코친차이나(Cochinchina)의 유일한 선교 지역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비록 캄보디아로 선교지를 정하였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안남어(Annamese)를 배워두라는 동료 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 언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19229, C&MA 선교회의 인도차이나 지역 선교사 실행위원회에서 코친차이나 남쪽인 쨔빈’(Travinh) 지역에 새로운 선교 거점 지역을 시작하기 위해 선임 선교사인 어윈(E.F Irwin), 올슨 선교사와 함께 하몬드 선교사의 배치를 결정하였다. 새로운 지역으로 가기 위해 다낭(Tourane)에서 출발하여 사이공에 도착한 어윈 선교사는 새로운 지역으로 가기 전에 먼저 캄보디아를 다녀오자는 제안을 하몬드 선교사에게 하였다. 이렇게 그는 갑작스럽게 프놈펜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프놈펜에 도착한 두 사람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총독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총독의 관저로 가서 면담 요구서를 제출하였다. 카드를 받은 직원이 총독에게 가져가자마자 그는 우리에게 와 총독이 만나겠다고 하는 것을 전해 주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일 년 전에도 방문하여 면담을 신청하였지만 아픈 거절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면 이렇게 쉽게 그를 만나는 것을 기대하지 않던 것이다. 그의 방에 들어가면서 엄격한 점검이 있었고, 회색의 벽과 어두운 조명 그리고 높은 천장은 마치 감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총독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총독을 만나자 아이린 선교사는 캄보디아의 상황과 몇 가지 농담을 하였고 총독은 얼굴 빛이 이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총독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하는 얼굴 모습이었다. 그 때 아이린 선교사는 제가 하몬드씨를 캄보디아에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이 곳에 정착하도록 하고 언어를 배워 캄보디아 사람들에 복음을 전하게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미 절반은 거절되리라는 생각과 함께 총독의 답을 기다렸다. 총독은 만약 당신이 캄보디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막을 수단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 아마도 당신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겠지만 당신들이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아도 좋소우리 선교사들은 그의 말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한 프랑스 사업가를 만났는데, 그는 이미 어윈 선교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에게 총독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는 웃으면서 이해가 됩니다.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한 본래의 총독은 한 달 전에 안식년 차 본국으로 돌아갔고 9개월 뒤나 돌아 온답니다. 지금의 임시 총독은 본 총독의 그러한 결정을 모를 것입니다. 만약 하몬드 선교사 외에 더 많은 선교사를 캄보디아에 보내고 싶다면 지금의 이 임시 총독에게 허락을 받으십시요

한편 하몬드 선교사의 약혼자인 킹 선교사는 192273, 미국을 출발해 프랑스에서 캄보디아의 또 다른 초기 선교사인 데이빗 엘리슨 선교사의 약혼자인 뮤리엘 헤리슨 선교사와 함께 언어 공부를 하고, 19221228,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192314,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인 시장의 사무실과 프랑스 개신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마침내, 19231월 말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더와 에스더 하몬드 선교사는 코친차이나 지방을 경유하여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이사하여 캄보디아 개신교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선행되는 일은 집을 구하는 일 이었다.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호텔이나 고급 빌라에 살고 있었기에 선교사들에겐 어울리지 않았고, 집을 구하던 중에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일종의 연립식 아파트와 같은 집을 구하게 되었다. 이어 집 주인의 소개로 언어 선생을 만나 언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하몬드 선교사의 첫 프놈펜 사역은 베트남에서 같이 온 베트남 사역자 띠엡과 함께 베트남어 예배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어서 지방으로 순회 전도를 다니면서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몬드 선교사의 가장 큰 사역은 캄보디아어 성경 번역이였다. 1924년부터 시작된 캄보디아 성경 번역은 1952년에 가서야 66권이 완역되었다. 그는 1962년 선교 사역에서 은퇴하였고, 1979721, 미국에서 83세의 나이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데이빗 엘리슨(David W. Ellison)

 

엘리슨 선교사는1898612, 미국 동부 메사스추세스주(Massachusetts)에 있는 카버(Carver)의 작은 침례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살 때 부모와 함께 성직자인 조부가 살고 있는 영국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만났고, 평생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로 헌신하였다. 그의 나이 19세가 되었을 때, 유럽에서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영국에 있는 남성들은 군대 징집을 위하여 등록을 해야 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하여 이웃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결국 근무하던 영국 은행을 그만 두게 되었다. 다른 직업을 구하려 하였지만 쉽지 않았고 자신의 삼촌이 있는 캐나다로 가게 되었다.

그의 삼촌은 안식교인이었는데, 캐나다의 사스캐처원 (Saskachewan)주의 무스조(Moose Jaw)라는 곳에서 함께 농사를 짓었다. 그는C&MA선교회가 발행하는 지금의 “Alliance Life Magazine”이란 잡지를 통해서 선교사의 부르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선교사 소명을 들은 삼촌은 기뻐하였다.

한편 엘리슨 선교사의 부인인 뮤리엘 (Muriel E. Harrison) 선교사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여덟살 때 교회에 찾아온 선교사의 말씀을 듣고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그녀는 캐나다의 머니토바주에서 태어나 농부이자 건축가인 아버지를 따라 온타리오주의 밀톤(Milton) 그리고 덴빌(Denville)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나약 성경학교에 가기 전에 온타리오주에서 교직과 간호과정 훈련을 받았다.

데이빗과 뮤리엘은 뉴욕의 나약 성경학교에서 만나 약혼을 하고, 언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갔다. 그곳에서 뮤리엘이 먼저 필드로 떠나고 데이빗은 6개월을 더 남아서 공부를 하였다. 19238, 데이빗 선교사는 베트남에서 같이 언어 공부를 하였던 윌리암 로빈슨 (William Robinson) 선교사와 함께 도착하였다. 베트남에 도착한 둘은 91, 결혼하였다.

1923, C&MA선교회 인도차이나 지역의 선교사 정기 컨퍼런스에서 두 사람은 캄보디아 서쪽 지역인 바탐봉 지역으로 임명을 받아 그해10월 그곳으로 들어갔다. 다음은 엘리슨 선교사가 보낸 첫 번째 기도편지 중의 일부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매달 30불 정도의 임대비를 내는 아주 적당한 집을 구하였습니다. 장소는 아주 적당한 곳입니다. 완전하게 캄보디아 사람들로 둘려싸여 있습니다. 이 집으로 들어온 지 두 주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청소하고 부서진 곳의 일부를 수리하고 있습니다. 집 주인이 저희를 위해서 청년 하나를 구해 주었는데, 올 해로 18세 입니다. 굳이 캄보디아 말을 몰라도 그가 우리의 의사를 알아 듣도록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언어 선생을 주셨는데 프랑스 말을 아주 잘 하는 선생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30 km 그리고 강을 따라 20 km에 수 천에서 수 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복음의 메세지를 받아 들이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엘리슨 선교사의 열정은 바탐방을 중심으로한 교회 개척과 특별히 캄보디아 신학교의 초석을 놓는데 헌신을 다하였다. 데이빗 엘리슨 선교사는 그의 사역이 40년이 되던 해인 1963927, 선교지를 돌아보던 중 심장 마비로 순직하였다. 그의 세 자녀 또한 선교사로 주님의 나라를 섬겼다.

 

 

 

4

 

초기의 사역과 열매들

 

성경학교

 

1924년 베트남 중부 다낭(Tourane)에서 열렸던 C&MA 선교회의 연례 선교사 컨퍼런스에서 엘리슨 선교사는 바탐방 지역에 성경학교 개설을 임명받고, 바로 그 다음 해 9월에 학교를 시작하였다.

선교지에 들어온지 불과 2년이 되던 해부터 성경학교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C&MA 선교회의 인도차이나 책임자로 있었던 제프리(R.A. Jaffrey) 선교사의 영향력이 있었다. 제프리 선교사는 1896년 남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다 1910년 선교회의 중국 필드 책임자가 되면서 우초우 지역으로 옮겨왔다. 그는 그곳에서 출판사를 열어 문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이어 치언다오에 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는 성경학교를 통해서 양성되는 현지인 사역자들이 복음 전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확신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1911, 베트남에서도 동일한 전략으로 1913년 하노이에 ‘Alliance출판사를 세우고, 1918년에는 베트남의 중부 다낭에 성경학교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략과 사역의 패턴은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베트남에 이어 복음의 문이 열린 캄보디아에도 적용되어 프놈펜에서 사역하는 하몬드 선교사에게는 성경 번역을 그리고 바탐방에서 사역하는 데이빗 선교사에게는 성경학교를 시작 하도록 하였다.

첫 해에 5명의 캄보디아인 신학생이 등록하였는데, 한 명은 코친차이나 지역의 껑터(Cantho)에서 나머지 4명은 캄보디아 국경 근처의 짜우독지방에서 왔다(다른 기록에는 ‘3명은 짜우독 근처의 찌똔(Triton)에서 오고 나머지 학생은 바탐방 지역에서 왔다고도 되어있다). 시작한지 두 주만에 두 명의 학생이 학교를 그만 두었다. 한 학생은 쭈온으로 가족의 반대 때문에 그만 두었고 또 다른 학생은 엘리슨 선교사를 통해서 첫 번째로 개종한 이었다. 그는 그만 죄의 유혹에 넘어가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캄보디아에서의 성경학교는 안남(현 베트남)에서 보다 어려웠다. 학생들의 일반적인 교육 수준이 낮았기에 교육의 내용은 초등 학문을 하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안남의 성경학교에 있는 신학생들은 중국어나 불어를 알기에 쉽게 교재와 성경을 알아 갔지만 캄보디아의 성경학교는 오직 누가복음만 번역된 상태여서 학생들이 성경을 공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학교 건물은 선교사의 사택과 같은 관내에 자리 잡았고,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학교 초기의 커리큘럼을 보면, 성경의 근본적인 교리(Fundamental Doctrines of the Bible), 누가복음 (Gospel of Luke), 그리스도의 생애(The Life of Christ), 구약의 역사(Old Testament History), 선지자와 선지서(Prophecy and Prophets), 복음 메시지(Gospel Messages), 성서 지리(Bible Atlas), 노래(Singing) 등이었다. 이 중에 노래와 성서 지리는 에스더 선교사가 가르쳤고 그 외 나머지 과목은 데이빗 선교사가 맡아 가르쳤다. 이 커리큘럼은 나중 1950년 대에 따크마으로 옮겼을 때 약간의 변동이 있게 되는데, 성서 지도(Bible Atlas), 기독교 사역의 방법(Methods of Christian Work), 해석학(Homileties), 증험론(Christian Evidences), 목회 신학(Pastoral Theology), 기독교 교리(Christian Doctrine) 뿐 아니라 비교 종교학(Camparative Religions)도 가르침으로 당시 캄보디아에 들어왔던 안식교와 타 종교를 비교할 수 있었다.

신학생들은 1년간 공부를 하였다. 다섯 사람은 1년간 순회 사역을 하며, 가정교회와 흩어진 기독교 가정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순회 전도를 하면서 전도지와 새롭게 번역된 성경의 부분들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성경학교는 기독교 전도가 자연스럽게 일어나 전파되는 핵심 장소가 되었다. 1926년에는 12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다.

학교가 본 궤도에 올라 학생 수가 늘어 날 때쯤 위기가 닥쳤다. 1928년 바탐방의 프랑스 식민정부의 지방 관리가 데이빗 선교사를 사무실로 불러 비난하였다. 허가 없이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과 비밀학교(clandestine school)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추방의 위협과 함께 모든 사역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선교사들의 긴급 모임과 기도 후에 데이빗 선교사는 지방 정부의 책임 관리자를 만나 전임 책임자가 허락하였음을 기억시켜 줌으로써 사역은 계속해서 진행해 갈 수 있었다.

선교회의 선교 정책이 변화함에 따라 성경학교 또한 운영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1930년부터 모든 학생들에게 자립 정책을 적용하여, 2년의 사역 기간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올 때는 일인 당 120(캄보디아 달러)을 학교에 납입하게 하였다).

그래서 학교의 운영이 정기적이고 장기적인 과정에서 단기 코스로(2회 정규 과정이 진행되었으며, 1회는 6주간 과정)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은 특별히 캄보디아인의 일상적인 삶에 잘 적응되었다. 캄보디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는데, 매 년 두 번의 기간은 매우 분주하였다. 그 분주한 시간들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비교적 한가하였다. 그래서 농사로 분주한 기간에는 각기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었지만 한가한 기간에는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하였다. 이 변화로 인해 몇 가지의 다른 변화가 생겼는데, 첫 째는 학생 수의 증가였고 둘째는 학생들의 자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기에 지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코스에 참여할 수 있어 평신도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목회자보다는 평신도 설교자가 되는 것이었다. 성경학교는 시작한지 불과 10년이 안되어 캄보디아 14개 도(Province) 11곳에서 이 성경학교 출신 기독교인들이 사역하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1941년 세계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 일부 지방이 강제로 태국에 편입되었다. 이에 바탐방 성경학교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어, 선교회는 학교를 캄보디아 중부 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선교사들이 돌아와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바탐방성경학교를 다시 시작하였지만 1948년 성경학교는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따크마우의 바싹 강변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19471210,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는데 졸업생의 배출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성경 번역이 완전하게 이루어지 않았기에 성경 번역을 기다리다가 졸업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졸업생은 4명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차우 보이(Chau Voich), 트리 혹(Tri Hoc), 냑 홈(Neak Hom), 속 츄옴(Sok Chhuam)이었다. 이들 중 3명은 이미 안수를 받고 사역 중이었다. 1949년에는 능 초이(Nget Choy)가 최초의 현지인 전임 강사로 임명되어 신입생을 가르쳤다.

1950년대의 성경학교는 여전히 신학 이론과 함께 실제적인 사역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좋은 요리사를 만드는 것은 좋은 요리 책이 아닌 것처럼 이론이 반드시 좋은 기독교 사역자를 만드것이 아니라고 선교사들은 여겼다. 성경학교 학생들은 매 주말마다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전도를 하거나 전도 책자를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교회의 성경학교 정책으로 학교를 졸업한 사역자들이 효과적으로 사역은 할 수 있었지만 아쉬운 점은 좋은 기독교 신학자를 양성하는 면에서는 실패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선교사들조차 대부분 미국의 성경학교를 졸업했을 뿐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학교(Seminary)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 번역

 

캄보디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 오기 전, 이미 캄보디아어로 번역된 쪽복음이 있었다. 캄보디아 언어로 가장 먼저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귀즐라프(Karl Gutslaf)” 로서 독일 출신 선교사인데, 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다. 1828, 신약 성경을 태국어로 번역하고1830년에는 이를 개정하고 이어서 성경 일부를 라오스어로 그리고 캄보디아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캄보디아어 성경 번역을 시도했던 이들은 16세기부터 캄보디아에 와 있었던 카톨릭 선교사들이었다. 19세기에 프랑스 수사인 마리-죠셉(Marie-Joseph Guesdon)은 성경의 복음서 일부와 카톨릭 기도서를 홍콩의 모 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또한 영국성서공회에 소속된 왈터 제임스(Walter James)1892년 공회의 코친차이나 지부의 책임을 맡고 1892년에서 1894, 남부 베트남의 미토’ (Mytho), 짜우독(Chaudoc) 그리고 캄보디아의 비엔호’(베트남어로 바다같은 호수; 이는 지금의 뚠레삽 호수를 말하는 것 같다) 지역을 방문하였다. 캄보디아의 왕자를 만나 중국어 성경을 건네주었고, 이때 프랑스 식민정부의 프랑스인 관리를 통해 왕실의 통역관인 봉(Vong)에게 누가복음을 번역하도록 설득하였다.

또한1889 년에 시암(지금의 태국) 지역에서 미국 성서공회를 대표하는 선교사로 세워진 존 칼링톤(John Carrington)1897년부터 1898년까지 캄보디아어 성경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방콕 시내의 절에서 캄보디아 어과 태국어를 잘하는 두 명의 승려를 찾아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십계명을 번역하였다. 당시는 활자가 없었기에 온전히 손으로 쓴 문서를 사용하였다. 이 책은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500부 출판되었다.

1925, 캄보디아에 있던 하몬드 선교사와 데이빗 그리고 레이노 선교사 등 세 가정 선교사는 성경 번역을 위한 번역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캄보디아 성경 전권을 번역한 하몬드 선교사는 번역 작업을 시작하기 전 캄보디아어로된 두 개의 누가복음과 하나의 사도행전을 얻게 되었다. 그는 막연하게나마 혹시 쪽복음이라도 구할 수 없을까하는 마음으로 방콕에 있는 미국성서공회의 사무실과 상하이에 있는 영국성서공회의 사무실에 동시에 편지를 보냈는데, 방콕으로부터 조그만한 소포가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캄보디아어로 쓰여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 본 하몬드 선교사의 언어 조력자는 비록 그것이 캄보디아어로 쓰여진 것이지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어 또 다른 소포가 도착하였는데, 영국성서공회가 보낸 것이었다 소포 속에는 동일하게 누가복음의 쪽 성경이 있었다. 언어 조력자는 나중에 온 성경의 번역이 먼저 온 것보다 해석이 용이함을 이야기하였다.

1925년 누가복음이 가장 먼저 번역, 출판되고 1926년에는 마가 복음이 출판되었다. 이어서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그리고 창세기가 연달아 출판되었다.

1931년까지 출애굽기와 잠언의 번역을 마쳤다. 1933년 마침내 신약성경 전권의 번역을 마치고 출판을 위해 하노이에 있는 미션 프레스에 원고를 보냈다. 하지만 출판을 위해서 필요한 캄보디아어 활자가 없었기에 타이프 라이터를 보내서 문자의 복잡함을 이해시키고 활자를 만들었으며 또한 하몬드 선교사와 언어 조력자가 하노이로 가게 되었다. 마침내 6개월의 수고를 통해 캄보디아어로 된 신약성경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1940년 구약까지 번역을 다 마친 후에 성경 66권 전권 출판을 앞두고 갑자기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캄보디아에는 그 전까지만 해도 권위를 가질만한 캄보디아어 사전이 없었는데, 성경을 출판할 때 즈음에 캄보디아 정부에서 사전을 발간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놈펜 불교대학의 명망있는 승려 츄언 낫(Chuan Nath)의 사전). 그런데 사전에 있는 발음과 이름이 성경에 있는 부분과 많이 달랐기에 어쩔수 없이 성경 전체를 다시 수정 보완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정을 앞두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성경 출판이 미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에 남겨둔 원고의 일부가 분실되어 다시 작업을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하몬드 선교사는 성경 번역에 온 종일 매달리다가 거의 시력을 잃을뻔 하기도하였다. 그는 안식년을 맞이해 원고를 뉴욕으로 가져와 하몬드 선교사 부부와 헤롤드(Harold Sechrist)의 감독하에 클리프 웨스터그린을 포함한 나약 신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활자화시켰다.

마침내 1952, 신구약 성경 66 권의 모든 번역 작업이 마쳐지고, 런던에 있는 영국성서공회를 통해 출판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201번째로 성경 전체가 번역된 것이었다.

1954, 두 컨테이너 분량의 성경이 프놈펜에 도착하여 성경학교를 졸업한 모든 목회자들에게 나누어졌다. 또한 당시 노르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에게 증정하기도 하였다. 성경은 1962년에 재개정 되었고 1968년에는 캄보디아성서공회가 구성되었다. 성경 번역 시, 원어보다는 주로 킹 제임즈(King James) 버전과 ARV(American Revised Version)를 참조하였다.

 

교회 개척 사역

 

캄보디아 선교를 주도했던C&MA선교회의 초기 선교 원칙 중의 하나는 모든 선교사의 사역은 교육이나 기관 보다는 복음적이고 능동적인 전도 활동에 있었다. 그래서 교육기관을 세우거나 자체의 교단을 세우도록 노력하지 않았다. C&MA선교회 사역에 대한 비전선언문(우리는 우리의 가진 모든 노력과 자원을 온 세계에 역동적이며 건강한 지역 교회를 세우는데 초첨을 맞춘다)에서도 하나님의 미션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는 그의 교회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C&MA선교회는 무엇보다 교회 개척 사역에 초첨을 맞추었다. 교회 개척 전략의 방법은 19세기 또는 20세기 초, 많은 선교 단체들이 실행했던 방법처럼 선교사들이 거주할 수 있는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베이스를 정하고, 전도 여행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가까운 시골 지역에 지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방식으로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1923

 

프놈펜

캄보디아 선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몬드 선교사가 프놈펜 지역에서 선교 베이스를 구축하고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베트남어 예배였다. 당시의 프놈펜에는 베트남인과 중국인들이 상당 수 거주하고 있었다. 하몬드 선교사를 따라 다낭성경학교에서 공부 중인 베트남인 티업형제가 사역을 도와 베트남인을 위한 예배를 시작하였다. 캄보디아인이 캄보디아어로 드리는 예배는 1927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복음 전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몬드 선교사가 선교회에 보고한 내용을 살펴본다:

“9월 컨퍼런스가 끝난 직후 우리의 사역은 일시 정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사역자는 매우 낙심되었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이라도 예배로 초청하여 말씀을 듣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노래를 하자 예배당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우리가 안으로 초청하자 마치 누군가에 쫒기는 것처럼 그들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처럼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매일의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비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순종하였고 결국 그 다음날은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923, 프놈펜 선교베이스에서는 5명의 베트남인과 2명의 캄보디아인이 세례를 받았는데, 두 캄보디아인은 젊은 헹(Heng)씨 부부였다. 8월에 프놈펜을 방문했던 제프리 선교사의 편지에 의하면, 헹씨는 하몬드 선교사의 언어 교사로서 캄보디아에서 최초의 세례를 받은 캄보디아 인으로서 그들은 중국계 혼혈의 캄보디안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자마자 주위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캄보디아로 돌아와 사역자가 되기 위해 다낭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갔다.

 

바탐방

프놈펜에 이어 두 번째로 선교베이스가 열린 곳은 캄보디아 서쪽의 바탐방이다. 바탐방에서 사역을 시작한 엘리슨 선교사에게 첫번째 기독교인은 옥 솟’(Oct Sot) 청년으로 그는 프놈펜 불어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나중에 엘리슨 선교사의 전도 현장에서 통역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

 

1925

회심의 열병이 캄보디아를 뒤덮었다. 1924년에 불과 10명이던 신자들이 1925년 말에는 80명이 되어 무려 800%의 성장을 하였다. 프놈펜에서는 5명의 세례자가 나오고 따까에우(Takeo)에 전도처가 마련되었다. 또한 3월에는 하몬드 선교사가 배를 타고 끄라체(Kratie)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다녀왔다.

바탐방 지역에서는 15명의 캄보디아인과 4명의 베트남인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두 지역에 전도처가 시작되었다. 그 중 하나는 바탐방에서 5마일 떨어진 돈테오(Donteo) 지역이었다. 이 곳에 작게나마 대나무로 된 예배 처소가 지어졌다. 엘리슨 선교사의 1925년 교회 상황 보고에 따르면, 한 해 동안 현지인 성도들이 낸 헌금이 108(현지) 달러인데 그 대부분은 베트남계 성도들이 헌금한 것이었다. 아울러 바탐방과 돈테오 두 곳에 주일 학교가 시작되었다.

한편 엘리슨 선교사는 65마일 떨어진 뽀삿(Pursat)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1925, 교회 개척에 있어서 주목할 부분은 하몬드 선교사가 베트남 국경 지역(짜우독 근처의 찌똔)의 캄보디아인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전도처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 해에 63명이 세례를 받았다.

1926년에는 바탐방 선교베이스에서 3(바탐방, 돈테오, 짠두스바)에 새로운 전도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30명의 세례자가 나왔다. 성경학교가 시작되자 현지인 사역자는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이 결과 교회 사역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1927년에는 바탐방 지역 예배 처소가 3 곳에서 6 곳으로 늘어났다(바탐방, 돈테오, 짠두스바, 코꾸뭄, 뽀삿, 시엠리엡). 그 해에 29(남자 20, 여자 9)이 세례를 받았다. 통계에 의하면 일 년에 약 506(현지) 달러의 헌금이 수납되었는데, 그 중에는 34명의 선교사들이 낸 헌금이 포함되었다. 아울러 깜뽓 지역에서 기독교 서적 판매와 전도 사역이 시작되었다.

1929년 캄보디아에 온 스미스 선교사(Gordon Smith)1930, 세 번째로 끄라체(Kratie)에 선교베이스를 개척한다.. 2년 뒤에는 끄발 쵸(Kbal Chour) 지역의 한 가정이 예수님께로 회심하였다. 이 그룹은 1950년 톰슨(Ed. Thompson) 선교사가 그 지역으로 배치되어 사역할 때까지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해 나갔다. 또한 193077일에서 10일 까지, 캄보디아 기독교인의 첫 컨퍼런스가 프놈펜에서 열려 12명의 전도자와 기독교 서적 판매 사역을 하는 현지인 사역자들이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1931, 깜뽓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깜뽕뜨라 (Kompong Trach)4번째 선교베이스가 세워졌고, 피터슨 (Floyd C. Peterson) 선교사가 그 지역으로 임명받았다. 또한 하몬드 선교사의 도움으로 깜뽕짬의 스쿤(Skoun) 지역에 그리스도인 가정이 생겨났다.

1933년 현재, 캄보디아 교회의 통계에 의하면 독립 교회(Independent Churches) 16, 독립 교회로부터 시작된 전도처(Outstations from above churches) 4, 선교 교회(Mission Churches) 8, 교회 멤버 304, 1932년 수세자 90, 헌금은 112.30(현지) 달러였다. 선교사는 총 4가정이 상주하였다.

C&MA선교회가 당시 선교 정책 중에 가지고 있는 현지인 교회의 구조는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먼저 안남(현 베트남)인 복음주의교회로 조직되었고, 이 원칙은 캄보디아 교회와 시암(현 태국) 그리고 라오스 교회에도 적용되었다.

 

당시의 안남인(현 베트남인) 교회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역교회: 목회자, 실행위원회 그리고 집사들의 평의회(Board of Deacons)

노회 또는 지방회(District): 실행위원회 그리고 지방회장

대회 또는 총회(Synod or General Assembly): 실행위원회 그리고 총재

각 교회는 자신의 문제를 다룰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헌법은 어느 정도 일정한 통일성을 요구하고 효과적인 행정 운영을 제공한다. 각 지역 교회는 자신의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지만, 이 청빙은 반드시 노회 또는 지방회와 총회의 실행위원회로부터 승락을 받아야 한다. 임명은 노회 또는 총회의 일반 위원회로부터 주어진다. 어떤 교회도 원하지 않는 목회자를 받으라 요구할 수 없다. 또한 어떤 교회도 목회자가 없는 상태로 계속 방치될 수 없다. 만약 지역교회가 적당한 사람을 청빙하지 못하면 임시적으로 노회 또는 지방회가 목회자를 임명할 수 있다. 지역 교회의 목회자 청빙은 2년을 임기로 교회 구성원들의 대다수(majority of Congregational vote) 투표에 의하고 그 다음부터는 80%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 목회자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외국인 선교사는 노회나 지방회 또는 총회의 멤버가 아니다. 그들의 임무는 순수한 조언과 영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1935, 깜뽕츠낭에 기독교인들이 생겨났다. 1936년에는 스바이리엥 그리고 깜뽓의 축 지방에(19363), 1938년에는 헤롤드(Harold Sechrists) 선교사가 시엠리엡(Siem Reap)에 그리고 1939년에는 테일러(Harry Taylors) 선교사가 깜뽕짬(Kampong Cham) 지역에 배치되어 선교베이스를 구축하였다.

1953년에는 캄보디아 14개의 도(Province) , 5개 도에 선교사들이 주재하였고, 나머지 7개의 도에는 현지인 사역자들이 사역하고 있었다. 1953년 말까지 단지 19명의 현지인 사역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3명의 베트남계와 4명의 중국계 사역자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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